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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10월 10일] <1522> 우창 봉기


1911년 10월10일 오후7시,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시 우창(武昌). 청나라가 애써 키운 신군(新軍ㆍ신식군대)의 공병중대가 총을 들었다. 하루 뒤 1만5,000여 신군은 우창은 물론 우한시 전지역을 장악했다. 한달 뒤 중국의 22개 성(省) 가운데 13개 성이 혁명에 합류했다. 신하이(辛亥)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우창봉기는 왜 일어났을까. 영국과 미국ㆍ독일ㆍ프랑스 4개국에 철도를 넘기려는 계획에 반대하며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들을 진압하라는 명령 때문이다. 신군의 3분의1이 개혁을 원하는 비밀조직에 가담한 터. 10월6일로 잡았던 거사가 연기된 마당에 조직이 탄로돼 체포와 처형이 잇따르자 병사들의 봉기가 자연적으로 터져 나왔다. 들불처럼 번지던 혁명의 불길은 청의 위안스카이가 지휘하는 또 다른 신식군대인 북양군에 막혔다. 북진이 저지되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가운데 혁명세력은 이듬해 1월 난징(南京)에서 쑨원(孫文)을 총통으로 추대하며 중화민국을 세웠다. 중국 역사상 최초 공화국의 걸음마는 쉽지 않았다. 우선 외세에 막혔다. 급격한 상황변화를 원하지 않던 열강은 북쪽의 청과 남쪽의 공화국 간 대화를 이끌었다. 결국 남북 간 내전은 피했지만 혁명의 과실은 청나라를 없애는 조건으로 총통 자리를 차지한 위안스카이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도 건국 276년 만에 깃발을 내렸다. 혁명세력을 탄압하며 '공화국의 황제' 자리에 올랐던 위안스카이 치하의 중국은 군벌이 할거하는 혼란시대로 접어들었다. 우창봉기는 민주공화국 수립이라는 목표에서는 절반의 실패를 맛봤지만 수천년을 내려온 봉건왕정체제를 무너뜨리고 현대 중국의 기반을 닦았다. 대만 국경일인 쌍십절(雙十節)도 우창봉기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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