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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칼럼] 은행 지배구조, 구조의 문제 아니다

이성규 유암코 사장


이성규 유암코 사장


1992년 12월 늦은 밤 짐 버크 최고경영자추천위원장은 새로운 최고경영자(CEO)감으로 같은 아파트 아래층의 한 인물에게 스피커폰을 연결했다. 지난 3년간 160억달러의 누적적자로 위기에 처한 IBM 이야기다. 다음달 결산은 한해 50억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한 주 전에 쫓겨난 존 애커스의 후임으로 루이스 거스트너는 이렇게 등장했다.

사실 거스트너의 경력은 정보기술(IT)과는 별 관련이 없었다. 과자나 신용카드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지휘하며 자신의 이력서를 채워왔을 뿐이다.

3월은 주총시즌이다. 주요 기업들은 경영진 개편으로 분주해진다. CEO는 물론 사외이사들도 물갈이 대상이다. 실적 부진도 있을 테고 임기만료도 있을 거다. 어쩌면 윤곽은 다 됐고 주총 승인일정만 남았을지 모른다. 은행을 낀 금융그룹의 지배구조는 늘 시장의 관심사다.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에 비해 실질적 지배 대주주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융당국도 은행을 둘러싼 지배구조에 대해 외부기관 용역도 맡기고 모범규준이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의견을 피력해왔다.

회장이나 은행장이 잡음으로 물러나기도 하고 금융당국의 징계를 받는 일이 빚어지거나 그 속에서 종종 사외이사들의 거취를 둘러싼 논란을 보노라면 지배구조의 진화는 아직 목표에 이르지 않은 모양이다.

사외이사 대부분 경영 경험 없어

과연 모범규준에 정답이 있기나 한 걸까. 가령 현 잣대를 들이대면 루이스 거스트너의 사례는 오히려 퇴화로 해석될 듯싶다. 우선 거스트너는 해당 업계의 전문가가 아니다. 일단 쇼트리스트에서 제외되기 쉽다. 절차도 문제다. 추천위원장이 비밀리 연락해서 수락여부를 먼저 묻고 영입을 추진했다. 소위 투명한 선발절차와 경합과정이 애매하다.



외환위기 이후 주인 없는 금융회사는 경영진 견제를 위해 이사회 내 사외이사 비중을 절대적으로 늘려왔다. 신기하게도 사외이사에는 교수·변호사·회계사 등 전문직이 많다. 기업경영의 직접경험이나 다양성 측면에서 CEO를 긴장시키기에는 뭔가 좀 느슨해 보인다.

하지만 이사회에서 반대의견이 전혀 없다며 거수기에 불과하다고 따져 묻는 게 우리의 인식수준이다. 많은 사외이사들이 회사 일에 충분히 시간을 쓰지 못한다. 요령 있는 회사는 미리 안건설명을 하고 의견을 구한다. 반대표결 기록을 많이 남기는 게 목적이면 차라리 사전설명 없이 회의장에서 생경한 안건을 들이대는 게 낫다.

사외이사 추천에는 회사가 실무적 도움을 준다. 그 과정에서 CEO의 영향력이 담긴다. 이론적으론 상위기관인 이사회가 그런 CEO를 뽑는다. 따지고 보면 사외이사 입장에서는 본인들이 의지하게 될 택군의 과정과 흡사하다. 독립성 운운해도 이사회란 자기들이 뽑은 CEO와 잘 지내야 편하다. 물론 두서없는 질문으로 경영진을 힘들게 해 존재감을 높일 수는 있다. 경영진과의 태생적인 정보 비대칭을 인정하면 경영일선에 대한 수첩 식 견제는 이사회의 본질이 아니다.

거스트너의 사례를 곱씹어보면 바람직한 이사회 기능은 쉽게 정리된다. 이사회는 CEO에게 조직 내부에서 후임자를 육성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소나무조차도 주변에 다른 나무가 자라지 못하게 솔잎을 뿌려댄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잠재경쟁자를 제거하는 타감 효과(식물간의 경쟁에서 다른 종의 성장과 번식을 방해하는 경향)의 이점을 모를 리 없다. 내부에서 CEO 승계가 없다면 이미 반쯤 실패한 조직이다.

이사회가 후계자 찾아 견제해야

대안부재를 내세울 CEO의 본능적 자기방어에 대비해 이사회는 늘 외부에도 경쟁자를 물색해둬야 한다. 언제든 투입 가능한 외부인사가 준비돼 있다는 신호를 줘서 CEO를 각성시켜야 한다. 임기만료나 특단의 사태에 임박해서 헤드헌터로부터 받아쥐는 롱 리스트만으로는 CEO의 상시적 긴장을 유발할 수 없다. CEO로 등극하는 순간 최고경영자로서 남은 역할이 자신보다 유능한 차기 CEO를 뽑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인물이 얼마나 될까. 이런 인물이면 현직 CEO에 대한 연임 우선권 부여 같은 고민조차 이사회에게는 시간낭비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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