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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십자각/9월 17일] 선한 피해자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표를 구하기 위해 줄을 선 당신.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매표소 창구가 가까워졌는데 갑자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앞줄에 끼어들어 먼저 표를 사려고 한다면 당신은 어떤 기분일까. 최소한 불쾌감이요, 심하게는 분노까지 느낄 것이다. 청약저축은 공공이 공급하는 전용 85㎡ 이하 중소형 주택에 청약할 수 있는 통장이다. 가입자격은 만 20세 이상 무주택 세대주. 추첨이 아닌 불입횟수와 불입액에 따라 주택 당첨자를 가리는 것으로 무주택 서민에게는 내 집 마련의 가장 확실한 보험상품이었다. 지난 5월부터 청약저축과 예금ㆍ부금을 통합한 '내집마련종합저축'의 영향으로 다소 줄기는 했지만 214만3,898명(8월 말 현재)이 통장에 꼬박꼬박 매달 10만원씩 넣으며 내 집 마련을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 그런데 이 줄이 야금야금 무너져가고 있다. 신혼부부가 어느새 그 줄의 앞에 서더니 최근에는 '근로자 생애최초 주택 청약'이라는 이름으로 통장에 가입한 지 몇 개월도 되지 않은 사람들이 앞줄에 끼어들었다. 조금씩 조금씩 뒤로 밀려난 청약저축 통장 가입자들은 어느새 자신들의 몫이 35%까지 줄어들어버린 상황에 놓였다. '장기' 청약저축 가입자들로서는 신혼부부 우선 공급이나 근로자 생애최초 청약자들에게 자신들의 파이를 뺏기는 셈이다. 그들은 정부가 우려하는 투기 세력도 아니다. 대부분 가입자들은 오랜 기간 무주택으로 살면서 자신의 통장 불입액이 늘어나는 것을 보며 내 집 마련의 꿈을 키워온 서민이다. 정부의 청약제도 개편이 낳은 '선한 피해자'들이다. 특히 이들의 박탈감은 보금자리주택과 맞물려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싸게는 시세의 절반 값에 분양되는 아파트 중 상당수 물량을 '새치기'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결혼한 지 채 3년이 안된 신혼부부, 청약통장에 가입한 지 채 몇 개월이 안돼 뒷줄에 서 있어야 할 사람들이 40대의 무주택 세대주보다 더 절실하게 내 집 마련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조차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청약시장에서 3.3㎡당 3,000만원이 넘는 강남권의 초고가 아파트가 일부 고소득 또는 부유층 자녀인 신혼부부들에게 특혜를 주는 상황을 경험했다. 누군가에게 우선권을 주기 위해서는 수혜자가 이를 받아도 된다는 사회적인 합의가 있어야 한다. 정부의 청약제도 개편이 비판 받는 이유의 밑바닥에는 사회적 합의의 부재(不在)가 깔려 있다.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우선권'의 다른 이름은 '특혜'다. 더욱이 그 특혜가 선량한 피해자를 낳는다면 이는 재고해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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