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6월 어느 토요일 저녁. 홍진영 ㈜효성 중국자싱법인 영업관리팀장(당시 동양나일론 영업기술과 사원)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 편직업체 공장를 찾았다. 극비리에 개발해온 시제품을 최종 테스트하기 위해서였다. 공장 관계자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시제품을 50㎏의 빔에 감기 시작했지만 채 10분도 안돼 홍 팀장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실이 버티지 못하고 도중에 끊어져버리는 참담한 실패였다. 홍 팀장은“기존 거래선을 의식한 편직업체를 설득하기 위해 수개월 동안 뛰어다니며 007작전을 펼쳤다”며 “일부러 공장에 사람이 없는 시간을 내서 원단공정 테스트에 나섰지만 첫단계부터 창피하리만치 처절하게 실패했다”고 회고했다. 실이 끊긴 원인은 유량계의 오작동. 구사일생으로 실패의 원인을 찾아냈지만 유량계를 재설계하려면 200억원이라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스판덱스사업 진출 5년만에 닥쳐온 최대 위기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나일론에서 벌어들인 돈을 쓸데없이 스판덱스에 퍼붓고 있다”, “개발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는 반대여론이 높아졌다. 경영진들도 1990년 스판덱스 개발에 뛰어들면서 300억원을 투입했지만 5년 동안 실패만 거듭하다 보니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세계 섬유시장이 나일론에서 스판덱스로 재편되고 있다. 절대로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김문선 ㈜효성 스판덱스PU 기술기획팀장(당시 섬유연구소 연구원)이 결의에 찬 설득을 거듭하자 경영진은 비로소 마음을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스판덱스의 미래가치에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그로부터 1년8개월이 지난 97년 3월11일. 마침내 새로운 설비가 시운전에 들어갔다. 63㎞ 길이의 스판덱스가 방사기에서 나와 실타래로 감기는 2시간 동안 팀원들은 천국으로 한발씩 다가갔다. 드디어 머리카락 3분의 1 굵기인 스판덱스가 끊김없이 모두 실타래에 감겼다. 7년간의 시행착오가 결실을 맺어 그토록 애를 태우던 스판덱스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아울러 한국이 세계에서 네번째로 독자적인 생산기술을 갖는 순간이기도 했다. ◇독자기술을 쟁취하라=“어느 때는 한달에 20번 이상 증합설비를 통째로 뜯었다가 조립하는 일을 반복했다. 심지어 기술개발의 대표적인 실패사례로 꼽히기도 했다” (이창황 ㈜효성 스판덱스PU 사장) 스판덱스 생산계획은 실패와 고난의 연속이었다. 기술개발과 설비국산화를 동시에 추진한데다 세계 최고 품질의 듀폰을 겨냥해 고품질 확보에 나섰기 때문. 게다가 ‘섬유의 반도체’로 불리는 스판덱스는 한치 오차도 없는 첨단기술을 요구했다. 이론을 실제에 적용하기 위한 실험만 수천번을 거듭했다. 생산설비에서도 매일 사고가 터져 수백번의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이 사장은 “독자기술을 고집하지 않고 외국으로부터 기술을 사왔다면 보다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기술개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며 회고했다. 파일롯(Pilot) 형태로 시작된 생산설비 Q1은 물론 Q2, Q3 등 연이은 증설에도 불구하고 제품의 질은 수년째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개발팀은 조석래 회장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첨단기술의 베일을 조금씩 벗겨나갔다. 조 회장은 “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어렵고 힘든 일에 부딪친다고 해서 쉽게 목표를 낮추거나 중도에 포기해서는 안된다”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독려했다. ◇세계 2위로 금맥을 캐다=97년 설비 Q4에 이르자 성과가 나타났다. 방사기를 국산화하고 스판덱스 품질을 개선하자 때마침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황윤언 중국 스판덱스 총괄상무(당시 생산과장)은 “운이 좋게도 외환위기를 맞기 전에 자체 기술을 확립해 스판텍스는 적자사업에서 흑자사업으로 전환했다. 오히려 외환위기 이후 회사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며 매년 증설을 거듭했다”고 말했다. 효성은 시장확대에 힘입어 99년 안양공장을 시작으로 2000년 구미공장, 2001년 중국 자싱공장(저장성), 2004년 주하이공장(광둥성) 등을 잇달아 준공했다. 이로써 2004년말에는 총생산능력 6만1,000톤 규모의 세계 2위 스판덱스 생산기업으로 우뚝서게 됐다. 이상운 ㈜효성 사장은 “당시 효성의 스판덱스는 원가나 품질면에서 뛰어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며 “특히 유럽과 미국 등 최고 품질을 요구하는 시장에서 효성의 시장점유율이 급격히 올려갔다”고 말했다. ◇고부가 제품으로 승부를 건다=그러나 주하이공장이 완공될 즈음 세계 스판덱스 시장은 공급과잉이라는 암초에 부딪혔다. 효성의 한 관계자는 “중국의 스판덱스 수요가 해마다 15% 이상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중국기업이 한꺼번에 설비를 늘려 공급과잉 상태에 빠져들었다”고 설명했다. 국내 업체들도 버티다 못해 잇따라 스판덱스 사업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독자기술을 갖춘 효성은 고품질에다 경제성 있는 제품을 앞세워 정상 가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정원 ㈜효성 홍보팀 부장은 “효성은 세계적인 제품경쟁력으로 시장의 요구에 부합하는 다양한 고부가가치 제품을 선보이며 인비스타(옛 듀폰)과의 격차를 줄여나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효성은 기술개발 노하우를 바탕으로 열에 강하거나 수영장 염소에 녹지 않는 스판덱스를 개발했으며 최근에는 항균성 스판덱스와 블랙 스판덱스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잇달아 내놓았다. 아직도 스판덱스 업계에 드리운 먹구름이 걷히지 않았다. 하지만 효성은 무한 기술경쟁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7년 동안 이어진 실패와 시행착오를 기술개발 노하우로 승화시킨 의지와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국내외 전문가들이 효성의 ‘크레오라’(스판덱스 브랜드)가 인비스타의 ‘라이크라’를 따라잡을 날이 그리 머지않을 것으로 보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다. creora 세계 공략 "이탈리아부터 뚫어라"
문전박대 굴하지않고 도전 품질테스트 거쳐 수출성공…이젠 대형전시회서 러브콜 '크레오라(스판덱스 브랜드명)의 세계시장 공략을 위해 이탈리아의 벽을 뚫어라' 2001년 10월 스판덱스 유럽수출팀에 떨어진 특명이다. 당시 유럽수출을 책임졌던 정재욱 팀장은 이탈리아 밀라노에 지사를 세우고 본격적인 유통망 구축에 나섰다. 섬유산업 종주국인 이탈리아에 성공적으로 입성하면 세계 진출의 보증수표를 거머쥐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정 팀장은 전화번호부를 일일이 뒤져 큰 거래선부터 찾았지만 제대로 만나주지도 않고 퇴짜만 맞았다. 유럽의 각종 섬유전시회를 샅샅이 훑고 다녔지만 듀폰의 '라이크라'와 거래하던 업체들은 부스에 발을 들여놓는 것조차 막을 정도였다. 정 팀장은 "유럽 진출의 장벽이 너무 높다 보니 그냥 서울로 돌아갈지 여부를 놓고 매일밤마다 고민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유럽 시장은 결코 놓칠 수 없는 황금시장이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열리는 법. 스판덱스 원사를 빔에 감을 수 있는 정경업체를 어렵사리 찾은 정 팀장은 크레오라의 품질을 내세워 100만유로 투자를 이끌어냈다. 이는 크레오라만의 설비였다. 이듬해인 2002년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스타킹업체를 대표하는 '뽐뻬아'의 문을 두드렸다. 이미 문전박대를 당한 곳이지만 이탈리아 공략의 관건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효성은 일단 테스트를 거쳤지만 제품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이탈리아 현지에 물류공장을 세우는 기지를 발휘했다. 대규모 창고는 물론 현지인을 고용해 기술매니저로 훈련시켰다. 경쟁사 제품과의 비교 테스트도 거쳤다. 결과는 크레오라의 대승리. 뽐뻬아가 크레오라를 선택하면 매달 수천만원의 비용절감 효과까지 내세웠다. 결국 크레오라는 뽐뻬아의 스타킹을 통해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이제는 유럽 어느 곳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됐다. 크레오라의 명성이 점차 알려지면서 유럽의 대형 전시회로부터 러브콜도 쏟아졌다. 세계에서 가장 큰 란제리 전시회인 인터필리에르(Interfiliere)는 2002년부터 참가해 대규모 전시공간을 마련했으며 유명 전시업체인 메세프랑크푸르트(Messe Frankfurt)도 매년 효성의 참가를 적극 권유하고 있다. 이창황 ㈜스판덱스PU 사장은 "지난 2004년 아시아업체에 좀처럼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프리미어비종(Premier Vision)도 크레오라에게 기회를 줄만큼 단기간에 크레오라의 위상이 올라갔다"고 전했다. 효성은 지난해 글로벌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뉴욕을 비롯한 밀라노, 홍콩, 상하이, 서울 등 세계적인 패션도시에 '크레오라 패브릭 라이브러리'를 열었다. 이 곳은 편직물 업체나 효성이 개발한 원단을 세계 유명 브랜드와 유통업체에 소개하기 위한 공간.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셀린느, 갭, 프라다 스포츠, 빅토리아 시크릿, 등 내로라하는 유명 브랜드 관계자들이 이 곳을 다녀갔다. 이제 효성의 고집스러운 기술력과 남다른 자신감은 패션의 본고장 유럽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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