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게가 지난 9월 19일부터 미국 샌프란시스코 미술관의 레지옹도뇌르 Legion d’Honneur관에서 ‘워치메이킹 속 예술과 혁신(Art & Innovation in Watchmaking)’ 전시회를 열고 있다. 이 전시회는 단일 시계 브랜드가 주요 예술 관련 박물관에서 진행한 가장 큰 규모의 전시회로, 내년 1월 10일까지 진행된다.
총 15개 섹션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회는 미국에서 진행된 전시회 중 가장 많은 브레게 앤티크 피스들이 선보여 오픈 전부터 시계 마니아들의 유별난 관심을 받았다. 총 70여 점의 오브제 중에는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 Abraham-Louis Breguet(1747~1823)가 시계 제작에 직접 사용한 장비 등도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끈다. 스위스 국립박물관 및 프랑스 모빌리에 국립박물관 등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는 브레게 시계 브랜드의 창립자로 기계식 시계 역사상 최고의 천재 워치메이커로 꼽힌다. 그는 현대 기계식 시계 원리의 대부분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듣는 인물로, 그의 등장으로 시계의 진화가 2세기나 앞당겨졌다는 찬사를 받는다. 추의 진동으로 메인 스프링을 감아 동력을 저장하는 셀프와인딩 퍼페추엘, 중력을 극복하기 위해 밸런스 스프링과 레귤레이터를 케이지에 넣어 회전시켜주는 투르비용, 충격 흡수 장치인 파라슈트 등 그가 개발한 시계 기술들은 현재에도 고급시계 제작에 필요한 주요 코어 기술들로 사용되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 등장한 브레게 앤티크 피스들 중 시계 마니아들이 특히 주목하고 있는 시계는 Marie-Antoinette N°1160, Tourbillon, Chronograph 세 모델이다. 각각이 브레게나 시계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의미 있는 모델들이기 때문이다.
Marie-Antoinette N°1160는 마리 앙투아네트(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왕비)와의 일화로 너무나 유명한 시계다. 평소 마리 앙투아네트와 두터운 친분 관계를 맺고 있던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는 어느날 그녀를 위한 ‘최고의 시계’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는 요청을 받아들여 1783년 Marie-Antoinette N°160 시계 제작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후 일어난 프랑스 혁명으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1793년 처형당하면서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 역시 정신적 방황을 겪으며 시계 제작이 잠시 중단되는 일을 겪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죽음을 슬퍼하던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는 이후 그녀를 위한 최고의 시계를 꼭 완성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는데, 이때부터 그는 이 시계에 들어갈 기술 개발에 전력을 기울이게 됐다. 브레게 헤어 스프링, 퍼페추얼 캘린더, 투르비용, 이중(二重) 초침을 사용한 크로노그래프 등이 이 시기에 개발됐다.
그는 새로운 기능을 개발할 때마다 Marie-Antoinette N°160에 이 기능들을 적용하기 위해 시계의 설계를 계속 바꾸었는데, 이는 시계 완성이 계속 연기되는 원인이 됐다. 결국 그는 Marie-Antoinette N°160을 다 완성하지 못하고 1823년 눈을 감았다. 이후 그의 아들과 제자들이 뜻을 받들어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 사후 4년 만인 1827년 Marie-Antoinette N°160을 완성했다.
Marie-Antoinette N°160은 마리 앙투아네트만큼이나 운명이 평탄치 못했는데, 급기야 1983년에는 도둑에게 탈취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스와치그룹은 포상금까지 걸고 이 시계를 되찾으려 했으나 찾을 방법이 묘연하자 2004년 이 시계를 아예 새로 만들기로 한다. 스와치그룹은 시계제작자와 엔지니어, 역사학자 등 50여 명의 전문가 집단을 구성해 시계 제작 착수 4년 만인 2008년 Marie-Antoinette N°1160을 완성한다. 말하자면 Marie-Antoinette N°1160은 Marie-Antoinette N°160의 복제품인 셈이다.
Tourbillon, Chronograph 두 시계는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가 Marie-Antoinette N°160 제작을 위해 개발한 여러 특별한 기술 중 시계 역사에 큰 획을 그은 투르비용과 이중 초침 크로노그래프 기술이 그의 손에 의해 직접 적용된 시계들이다. 두 기술이 사용된 최초의 시계라 봐도 무방한 셈이다. 시간 계측 기능인 크로노그래프는 니콜라스 뤼섹 Nicolas Rieussec이 1821년 처음 개발했으나, 이에서 더 발전돼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다중 초침 크로노그래프는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가 1820년 처음 개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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