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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육룡이 나르샤’… 한양 천도





‘새 서울에 이르러 옛 한양부의 객사를 이궁으로 삼았다(至新都 以舊漢陽府客舍爲離宮).’ 조선왕조실록 태조 3년(1394년) 10월28일의 기록이다. 한양 천도의 주역은 태조 이성계과 정도전. 개경의 지력이 쇠했다는 풍수지리설에 근거, 터전을 새로 닦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정치적 속셈은 따로 있었다. 개경 일대에 땅이 많은 개국공신들의 권력 약화를 통한 왕권 강화!

민심도 두려웠다. 고려의 충신 최영 장군을 처형할 때 상인들이 동맹 철시(撤市)하고 정몽주를 흠모하던 개경을 떠나고 싶었다. 태조가 잠시 머무는 행궁(行宮)이 아니라 눌러앉으며 이듬해인 1393년에는 이름도 한양에서 한성부를 바꿨다.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벼슬을 내던지고 개경 부근 두문동에 낙향한 선비 72명이 조정 출사를 재촉하며 마을을 불태우는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한 채 불타 죽은 사건(1397년) 이후 이성계는 구 왕도 개경으로의 환궁에 대한 미련을 털어버렸다.

조선 개국(1392년 7월)과 동시에 나온 천도 논의가 구체화한 것은 이듬해 1월. 이성계의 스승인 무학대사가 꼽은 첫 후보지 개룡산 부근은 국토의 중앙이 아니라는 이유로 10개월 만에 공사를 접었다. 하륜이 제시한 신촌과 연희동 등 무악 일대도 장소가 비좁다는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천도작업이 번번이 제지되자 태조는 ‘고구려나 백제ㆍ신라가 도읍했던 곳이라도 가겠다’며 신하들을 다그쳤다. 개경이 그만큼 싫었다.



한양이 도읍지로 정해진 것은 개국 2년 만인 1394년 8월. 정도전의 건의에 따랐다.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이 제시한 경제적 이유가 먹혀들었다.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쌀 같은 곡식으로 받던 시대에 지방 창고의 조세미(租稅米)를 서울의 창고(京倉)로 운반하는 조운선(漕運船)이 들어오고 나가기에 한양은 천혜의 조건을 갖고 있었다.

천도 이후 왕자의 난을 겪으며 왕궁이 개경으로 잠시 돌아간 적이 있었어도 한양은 TV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주인공인 태종 이방원 이후부터는 조선왕조 내내 도읍으로 자리를 지켰다. 태조가 한양으로 들어온 입경일 10월28일은 정도(定都) 600주년인 1994년부터 ‘서울 시민의 날’로 내려온다.

한양 천도의 동력은 조선 건국에서 나왔지만 천도 자체는 해묵은 과제였다. 공민왕 시설부터 우왕, 창왕에 이르기까지 고려를 중흥시킬 지력을 지닌 수도 이전을 추진했으나 여말 혼란기에 궁핍해진 재정에 번번이 막혔다. 한양 천도는 50년 이상 세월을 거치며 꾸준하게 논의된 끝에 결정됐던 셈이다. 순식간에 결정해 땅과 강을 파헤치는 행태는 유전인자로 내려온 게 아니라 시대의 돌연변이인 모양이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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