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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돈 정당, 그린백당





‘돈을 찍어 가족을 구하자.’ 1874년 11월 25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한 정당의 창당대회 구호다. 중서부 농부들이 주로 참여한 이 정당의 이름은 그린백당(the Greenback Party). 동부의 문외한들은 창당 소식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린백이라, 당명에 왜 돈의 이름을 붙였지?’

그랬다. 그린백은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의 전비를 감당하기 위해 마구 찍어냈던 전시 불태환 지폐. 뒷면이 녹색이어서 그린백이라고 불렸다. 오늘날 달러의 별칭인 ‘그린백’이라는 이름도 이 화폐로부터 비롯됐다.

정치사에 유례 없이 돈 이름을 당명에 붙인 정당이 탄생한 이유는 물가하락. 특히 농민들이 고통 받았다. 경제학자 J.K 갤브레이스가 남긴 ‘경제학의 역사’에 따르면 그린백당 창당 무렵 농산물 가격은 10년 전에 비해 절반 가량 떨어졌다.

농민들은 농산물 가격 폭락을 정부의 통화량 조절 정책 탓이라고 봤다. 남북전쟁 당시의 전쟁 공채를 갚기 위해 남발한 지폐(그린백)가 물가 폭등을 야기하자 발동된 그랜트 행정부의 통화 환수로 돈이 귀해지고 물가가 떨어졌다는 인식이 창당의 배경. 더욱이 미국 전역에 닥친 1873년 공황은 물가를 더욱 떨어뜨렸다. (경제사가 찰스 킨들버거에 따르면 1873년 공황은 43개월간 지속된 ‘장기공황’이며 모든 인류가 공유한 최초의 세계적 공황이었다.)



물가의 추가 하락을 막기 위해 그린백당의 농부들은 지폐 그린백의 추가 환수 저지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구호도 ‘통화 증발(增發)’과 함께 ‘자유로운 화폐주조’를 내세웠다. 인플레정책을 요구한 셈인데 이 대목에서 의문이 나옴직 하다. ‘물가가 뛰는 게 농부들에게 이로울까?’

21세기 한국이라면 해롭겠지만 19세기 중·후반 미국 농부들은 물가고를 축복으로 여겼다. 농업에 투입되는 비용이 거의 없었던 덕분이다. 무한대로 펼쳐진 땅을 쉽게 취득하고 스스로 지은 통나무집에 살며 노동력을 투입한 소출의 가격이 오르면 오를수록 농부들의 이익이 커졌다. 갤브레이스는 이런 현상을 “농부들이 ‘화폐공급량에 따라 물가가 정비례한다’는 화폐수량설을 배운 적이 없어도 본능에 따라 적극적으로 실천한 셈”이라고 풀이했다.

그린백당은 기세 좋게 당세를 불려 나갔다. 미국 중서부와 남부의 평원지대에 이르기까지 위세를 떨쳤다. 세를 불린 그린백당은 1876년 대통령선거에 증기기관차 개발자 출신인 거부 피터 쿠퍼(아이비리그 이상의 ‘강소대학’으로 평가받는 쿠퍼 유니온 대학 설립자)를 후보로 내세워 패배했어도 1878년에는 하원 의석 21개를 얻는 돌풍을 일으켰다. 그린백당은 부침 속에서 창당 10년 만에 새로운 진보정당으로 흡수되고 화폐증발에도 실패했지만 더 이상의 환수를 막는 데는 성공, 그린백 지폐는 2차대전 직후까지 쓰였다.

‘돈의 정당, 그린백당’은 19세기가 남긴 우화(寓話)의 한 토막이나 미국 포퓰리즘 정당사의 쪼가리에 머물지 않는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화폐제도를 공부하고 세상을 바꾸려 기득권에 맞섰던 정신들이 ‘초강대국 미국’을 잉태한 숨은 배경인지도 모른다. 그린백당이 추구했던 가치들도 여전히 살아 있다. 보호무역과 외국인 이민 배척, 여성 참정권 확대는 미국 양대 정당의 정강으로 자리 잡았다. 역사상 최초로 화폐제도에 근간한 정당이 출현한 지 141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른 정당이 출현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남아 있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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