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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마일 원전 사고의 두 얼굴





1979년 3월 28일 새벽 4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쓰리마일 섬. 원자력 단지에서 경보가 울렸다. 가동 4개월째인 2호기의 냉각수 급수 펌프 파손! 서스퀘해나 강의 냉각수로 식었어야 할 원자로 온도가 2,200℃까지 치솟으며 노심 내 연료봉이 녹아버렸다.

대규모 인명 피해를 우려한 펜실베이니아 주 당국은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다행스럽게도 인명 피해는 없었다. 발전소 근무자 200여명이 병원 진단을 받은 정도다. 방사능 물질이 다섯 겹으로 차단된 격납 건물 안에 갇혀 환경 피해가 전무하다는 공식 발표가 나왔지만 미국은 충격에 빠졌다. 새로 건설한 원전의 설계 결함이 원인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비슷한 원자로도 많았기 때문이다.

피해도 컸다. 원전 건설 비용만 20억 달러. 원자로 해체 작업에도 10억 달러가 들어갔다. 사고 진위 공방전도 일어났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사고 직후 쓰리마일 섬을 방문해도 환경단체들은 정부 발표를 믿지 않았다. 발표와 달리 가축 피해가 발생했고 암 발생률도 높아졌다는 자료를 내밀었다. 논란은 요즘도 계속되고 있다.*

분명한 점은 두 가지. 강도 높은 안전대책이 강구되고 미국의 신규 원전 건설이 크게 위축됐다는 사실 뿐이다. 먼저 방대한 원전 규제대책이 나왔다. 백악관과 상원, 미국 원자력위원회 등 5개 조사위원회가 별도로 사고 원인을 분석·조사한 결과다. 결국 미국은 기존에 건설 승인이 났거나 건설 중인 원전을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신규 원전 건설을 중단해 버렸다.

석유 가격도 뛰었다. 마침 이란의 이슬람 혁명으로 중동산 석유공급이 줄어들던 시점에서 원전의 추가 건설마저 물 건너갈 것이라는 전망 속에 세계는 2차 석유 위기의 한복판으로 끌려 들어갔다. 원유 소비국인 한국의 받은 타격은 더욱 컸다. 쓰리마일 사고 이듬해 성장률이 마이너스 상태로 떨어졌으니까.**

다만 한국은 뜻하지 않은 소득을 거뒀다. 안전 기준이 까다롭고 규제를 상대적으로 많이 받는 미국에서 갓 건설된 원전마저 사고를 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인식한 각국은 원전 건설 계획을 줄이거나 접었다. 1977년에 고리 1호기의 상업운전을 시작했던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이 ‘20세기 말까지 원전 44기를 짓겠다’고 공언했던 터. 세계 최대의 시장으로 떠오른 한국에는 원자로를 판매하려는 각국의 비즈니스맨들로 붐볐다.

경북 울진에 세워진 한국 9호기와 10호기의 원자로 공급을 미국 회사가 아닌 프랑스 프라마톰사로 굳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랑스는 당시 파격적인 가격을 제안하는 당근책과 함께 ‘프랑스 원자로를 구매하지 않을 경우 북한과 수교하겠다’는 으름장을 동시에 사용, 결국 승리를 따냈다.***



미국의 원전 회사들은 더욱 몸이 달았다. 뒷마당으로 여겼던 한국에서 프랑스와 캐나다 원전사들이 잇따라 수주하자 기술 제공의 차원을 높였다. 오늘날의 한국이 원전 설계에서 시공, 감리에까지 기술을 습득한 데에는 기술도입선 다양화 정책과 엔지니어들의 노력과 더불어 쓰리마일 섬 원전 사고의 반사이익이 깔려 있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쓰리마일 섬 원전 사고가 났을 때, 한국은 물론 일본까지 “우리의 원전은 미국의 쓰리마일 섬 원전과 다르다”며 안전성을 강조했다. 1986년 구소련 우크라이나 지역 체르노빌에서 사상 최악의 원전 참사가 발생했을 때도,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전이 사고를 일으켰을 때도 우리의 반응은 마찬가지다. 우리 원전은 다르다.

과연 그런가. 원전은 수 많은 얼굴을 갖고 있다. 미국에서는 상업용 원전의 건설이 다시 고개를 드는 분위기다. 어떻게든 관련 기술을 유지하면서 안전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하는 게 원전이다. 우리의 현주소는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않다. 원전 마피아가 판치고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이 남은 일본 농산물, 어류 수입이 끊이지 않는 판이니….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쓰리마일 원전사고가 의도적으로 부풀려졌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고유가를 극복한다고 원전을 건설하면 큰 재앙이 올 수도 있다’는 주장과 비판의 배후에 석유 메이저들이 있다는 것이다. 기름의 수요가 많으면 많을수록 돈 버는 석유회사들이 ‘원전은 위험하다’는 사고를 확산시키려 홍보예산을 지출한 정황이 곳곳에 나온다. 심지어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의 유럽을 휩쓴 ‘반핵’ 데모에도 국제 석유 메이저가 뒷돈을 댔다는 기록도 있다. 그만큼 석유메이저와 원자력은 상극이었다.

** 혹자는 1980년의 경제 후퇴가 ‘박정희 대통령 서거’ 때문이라고 강조하지만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가장 큰 것은 2차 석유 파동이었고 한국은 유달리 심하게 그 영향을 받았다. 정부와 서울시의 재정을 집중 투자했던 서울 강남의 대로에 ‘테헤란로’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 공들인 국가, 원유의 주요 공급선이던 이란에 회교 혁명이 일어나 원유 수급조차 어려운 처지였다.

*** 울진에 건설된 9,10호기의 공급자가 최종 결정된 시기는 1980년이나 1979년 6월께 이미 프랑스와 최종 합의 단계였다. 미국은 핵 폭탄을 제조하려는 박정희 대통령이 프랑스가 건설할 원자로에서 우라늄을 농축할 것이라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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