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의 사금고라는 의혹을 받는 말레이시아 국영투자기업 1MDB가 잘못된 경영판단과 감독부실로 14조원대의 빚더미에 앉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1MDB의 실질적 배후였던 나집 총리는 배제한 채 경영진에게만 책임을 떠넘긴 의회 보고서가 오히려 국내외의 총리 퇴진 여론을 촉발하고 있다. 1MDB는 나집 총리가 국내외 자본을 유치해 경제개발사업을 벌이려는 목적에서 설립한 국부펀드다.
말레이시아 의회의 공공회계위원회(PAC)는 7일(현지시간) 1MDB의 부채가 설립 당시인 지난 2009년 50억링깃(약 1조4,738억원)에서 올해 초 500억링깃(약 14조7,380억원)으로 10배 이상 불어났다며 ‘채무 돌려막기’ 등 안일한 경영이 이 같은 결과를 낳았다고 발표했다. PAC는 1MDB가 2014년 4월부터 2015년 3월까지 이자 지급에만 33억링깃(약 9,727억원)을 퍼부었으며 채무상환을 위해 빚을 내는 악순환을 거듭했다고 지적했다. 또 이사회 승인을 받지 않고 2012년 42억링깃(약 1조2,342억원)에 달하는 거금을 해외 합작회사(JV) 설립에 쏟아붓는 등 자금을 불법 집행한 증거가 발견됐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PAC 보고서는 말레이시아 총선 직전인 2013년 1MDB 자금 6억8,100만달러(약 7,850억원) 상당의 비자금이 나집 총리의 스위스 비밀계좌로 들어간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스위스 검찰이 1MDB가 운용하는 펀드에서 40억달러(약 4조6,000억원)를 나집 총리가 유용한 정황이 드러났다고 밝혔음에도 경영부실의 책임을 전임 최고경영자(CEO)인 샤롤 이브라힘이 져야 한다는 결론을 냈다. 이날 보고서가 공개된 후 1MDB 이사진은 집단 사퇴했다. 현재 나집 총리는 자문위원장으로 경영일선에서 한발 물러나 있는 상태다.
의심스러운 ‘꼬리 자르기’ 정황이 계속되자 말레이시아 여론은 말레이시아 검찰이 나집 총리의 비자금은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선물”이라며 사건을 종결해 대대적인 퇴진시위가 발생했던 1월처럼 들끓고 있다. 이번 고위경영진의 퇴진은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 식 조치라는 것이다. 마하티르 모하맛 전 총리를 비롯해 야당 지도자, 시민운동가들은 나집 총리에 대한 공세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야당 인사인 자이드 이브라힘 전 법무장관은 “집단사퇴는 ‘우리는 비난을 받겠지만 나집 총리는 무죄로 밝혀졌다’는 의도 하에 계획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와중에 나집 총리 부부가 1,500만달러(약 172억원) 규모의 사치품을 비자금으로 구입했다는 의혹도 새롭게 불거져 정국은 더욱 꼬이고 있다.
해외 여론도 나집 총리에게 부정적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날 “말레이시아가 나집 총리의 권력을 위협하고 국가 경제를 위기에 빠뜨린 1MDB스캔들을 덮고 싶어한다”고 비꼬았다. 특히 나집 총리의 불법적 행위에 대한 각국의 수사는 확대되고 있다. 스위스에서 시작한 각국의 1MDB발 비자금 수사는 룩셈부르크와 싱가포르·홍콩 등 아시아와 유럽 일대로 번진 상태다. 미국 연방수사국(FBI)도 1MDB를 수사 대상에 올렸다. FBI는 미국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가 나집 총리를 도와 돈세탁에 나섰다는 의혹과 함께 회사 자금이 기존 투자처와 연관도 없는 영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 유입됐다는 혐의 등을 살펴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수민기자 noenem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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