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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타는 만남 A to Z] 국내 1호 ‘비어소믈리에’의 맥주 사랑 이야기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업(業)으로 삼은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죠.”

대학교 4학년 때 한 취업 강연에서 들은 조언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게 됐다. 그리고 정확히 12년 뒤 그는 오랫동안 몸을 담은 안정적인 직장을 때려 치고 취미에 남은 인생을 걸었다. 평범한 10년차 직장인에게 닥친 혹독한 제2의 사춘기, 퇴사를 앞두고 떠난 마지막 휴가에서 운명의 맥주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펼치게 됐다는 그의 파란만장 인생 스토리.

“어차피 인생 한방, 치어스(Cheers)잖아요!”이라며 호탕하게 웃으면 말하는 국내 1호 비어소믈리에 구충섭씨를 서울경제썸이 만났다.





서울 양재동에 위치한 Beer Lab(맥주협동조합)·KnR 코리아 대표 겸 비어소믈리에인 구충섭씨


안녕하세요. 비어랩 대표이자 KnR코리아(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의 맥주 수입업체) 대표, 비어소믈리에로 활동 중인 구충섭(40)입니다.



대학 시절 기계공학과를 전공했어요. 그러던 중 친한 선배의 권유로 패션업계 경영 총무부에 입사하게 됐죠. 살면서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생소한 업무를 하니까 너무 재미있었어요. 늘 적극적으로 나서서 아이디어 제안을 하고 더 배우려고 노력했더니 패션 기획팀으로 배치를 받았죠. 매일 새로운 업무를 익히고 선배들 따라다니며 엄청 배웠죠. 하지만 직장인 10년차부터 슬슬 제 업무와 제 인생에 대해 고민하게 됐고, 제가 하는 일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내가 이 일을 평생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죠. 제2의 사춘기에 접어든 셈이죠. 결국 반항기 어린 마음에 사표를 내고 말았어요.(웃음)



2014년 10월, 전국의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 19명이 모였어요. 이 조합원이 공동으로 출자해 맥주 양조장을 만든 거에요.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여 더 맛있는 맥주를 개발해보자는 취지였죠. 맥주에 들어가는 재료의 배합을 자유롭게 해 크래프트 비어(Craft Beer)를 연구하거나 새로운 맥주 레시피(Recipe) 개발을 하기도 하고, 맥주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교육하는 것이 저희 조합의 설립 목적이자 지향점이예요.



맥주 수업 사업을 하기 전 패션 회사를 그만두기까지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어요. 늘 상품 발주량과 매출로 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어요. 영업이 안돼 압박감이 심했죠. 12년차 접어들면서 업무에 대한 한계를 느끼게 됐고 ‘여긴 내 자리가 아닌 것 같다’는 갈등을 심하게 겪었어요. 고심 끝에 사표 내기 전 마지막 휴가로 벨기에로 여행을 가게 됐어요. 결과적으로 그 여행이 제 사업의 시작이자 새로운 도약으로의 기회였던거죠. 아직까지는 일하면서 힘든 점보다 매일 새롭고 재미있고 즐기는 단계인 것 같아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맥주이자 운명의 맥주는 ‘바이엔슈테판 헤페바이스’예요. 9년 전 특별한 계기로 접하게 되어서 저한테 더 의미 있는 맥주죠. 국내에 첫 수입돼 마트에 입점했을 당시 마침 제 와이프가 첫 애를 출산하고 자축파티를 했거든요. 맥주 코너에서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판촉 사원이 새로 나온 맥주라며 추천해줘서 구매하게 됐죠. 그때 처음 세계 맥주를 마셔봤는데 굉장히 신선했어요. 그때부터 세계 맥주에 빠지게 되었는데 심지어 국내에 없는 맥주를 공수하기 위해 일본을 갈 정도였죠.(웃음).



맥주는 기본적으로 물, 보리, 홉, 이스트 4가지의 조합으로 만들어진다. 이 재료를 적정한 비율로 담그고, 발효·저장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여과한 액체가 맥주다.


흔히 와인은 ‘신’이 만들고 맥주는 ‘사람’이 만드는 음료라 불러요. 와인의 주재료인 포도가 잘 자라려면 기후, 토질 등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많죠. 하지만 맥주의 경우 직접 몰트(malt, 보리에 적당한 온도의 물을 붓고 약 3일간 두어 발아시킨 것)를 만들고 배합하는 과정을 사람이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죠. 그렇기 때문에 직접 맛보면서 새롭게 혹은 발전된 맥주가 탄생할 수 있는 거에요. 간단하게 어디서든지 쉽게 마실 수 있는 대중적이고 저렴한 술이지만, 제 생각에는 천차만별 각기 다른 사람의 인생처럼 맥주도 각양각색의 매력을 가진 굉장히 재밌는 창작물인 것 같아요.



구충섭씨가 운영하는 비어랩(beer lab·맥주협동조합)의 한 켠에 놓여 있는 다양한 맥주잔들.


평소 그릇에 관심이 많은 편이에요. 약간 여성스럽나요?(웃음) 직장 생활할 때 퇴근하고 동료들이랑 펍을 자주 갔었는데 우연히 맥주잔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됐죠. 어느 순간 맥주잔의 매력에 꽂혀서 계속 취미로 모으게 됐어요. 지금까지 약 2,000~3,000개 정도 모은 거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 수집할 거예요(웃음).





맥주협동조합은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끼리 만든 공동회사로 모두가 회사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낮에는 주로 제가 여기서 수입 맥주들을 관리하거나 고객들에게 판매하고, 저녁엔 다른 조합원들이 직장 퇴근 후 맥주 제조와 교육을 해요. 저는 이 일이 본업이지만 다른 조합원들은 평소 일반 직장 생활을 하고 있거든요. 무엇보다도 모두가 자발적으로 여기에 모여 자신의 취미를 업으로 삼아 일하니까 더 자유롭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웃음)



처음 맥주 수입업을 시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아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퇴사 전 휴가로 간 벨기에 여행에서 갑자기 떠오른 거였으니까요. 그래서 여행 중 사흘 동안은 벨기에 전역을 돌면서 매일 삼시세끼 다양한 맥주를 마셨어요. 그런데 어느 펍을 가도 맥주의 맛이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와 각 개성을 갖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여행 마지막 날 무작정 한 브루어리(맥주 양조장)를 찾아가 벨기에 현지 맥주 도매상(수출업체)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때 뭔가에 홀렸던 것 같아요. 운이 좋게도 몇몇 현지 맥주 수출업체를 소개받게 되었고, 지금의 제 사업 파트너인 브루어리와 도매상을 얻게 되었죠. 제 노하우는 튼튼한 두 다리와 적극성, 그리고 천운 아닐까요?



맥주에 푹 빠져있을 당시엔 비어소믈리에 강의가 없었어요. 그래서 처음엔 서점을 찾아가 맥주 관련 책들이나 인터넷 검색으로 일일이 찾으면서 독학하다가 2009년 수수보리 맥주아카데미(경기대학교와 농업기술실용화재단이 공동 설립한 양조 교육 기관)를 알게 되어서 맥주 제조과정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웠어요. 그리고 2014년 4월 국내에 세계적인 맥주 전문 교육기관인 독일 되멘스 아카데미(DOEMENS Akademie) ‘비어소믈리에 한국어 과정’이 개설됐다는 소식을 듣고 얼른 수강했죠. 총 2주 단기 과정이고 맥주 재료의 이해부터 양조기술, 감각훈련, 푸드 페어링(음식과의 조합), 맥주의 묘사(프리젠테이션)로 구성되어 있어요. 하지만 그 수업을 듣는다고 해서 모든 지식을 다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예요. 워낙 종류도 많고 맥주도 하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복잡하고 어려운 분야거든요. 특히 소믈리에라는 직업이 상품을 테이스팅하고 이해하기 쉽게 느낌을 전달하는 직업이다 보니 최대한 많은 맥주를 마셔보고 차이를 직접 느껴보면서 노력해야 되는 분야인 것 같아요.



저희 가게에 오시는 대부분의 고객들은 맥주 ‘덕후’들이 많아요. 대형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맥주들이 구비돼 있으니까요. 연령대는 3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해요. 때론 고객들이 먼저 “새로운 맥주를 먹어봤는데 정말 맛이 독특하더라”며 사진을 보여주시면서 제안하기도 해요. 대부분 단골 고객이니까 저에게 더욱 소중한 존재고, 친구처럼 돈독하게 지내고 있어요.

수입의 경우, 사업 초기엔 직장에서 모아둔 돈과 와이프의 도움으로 꾸려나갔어요. 다행히 벨기에 맥주를 수입할 당시 국내의 경쟁 업체가 없었고, 협동조합으로 공동출자니까 상대적으로 위험부담이 적었어요. 지난해 매출만 6억원 정도 됐어요.







비어소믈리에의 가장 중요한 일은 맥주 종류에 따라 잘 어울리는 음식과 매칭해 고객들에게 추천해주는 것이죠. 간단하게 맥주 페어링(특정 맥주에 잘 맞는 음식을 찾아 매칭하는 것) 팁을 드리자면, 일반적으로 호프집에서 파는 생맥주인 라거류는 기름진 튀김이나 치킨이랑 잘 어울려요. 스타우트라고 부르는 흑맥주 종류는 반대로 튀김류와는 안 어울리죠. 쓴맛이 강하니까 달콤한 초콜릿이나 케잌 등 디저트가 잘 어울려요. 바이젠의 경우 특유의 달콤한 향이 있어서 매운 음식(제육볶음, 떡볶이)과 잘 어울지죠.



비어소믈리에로 생계를 유지하기에는 사실상 어려운 것 같아요. 아직까지는 국내에 대중화되어 있지 않거든요. 수강료도 매우 비싼 편이구요. 특히 일반인들이 쉽게 만들어서 판매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직업으로서 수입을 얻기에는 좀 힘든 실정이죠. 하지만 맥주를 판매하거나 제조하는 공장에서는 이 자격증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유럽에서는 브루어리(양조장)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수업을 듣고 자격증을 갖고 있어요. 국내에서도 좀 더 맛있고 고급 크래프트(소규모 양조장이 자체 개발한 제조법에 따라 만든 맥주. ‘수제 맥주’)를 개발하고 즐기기 위해서는 맥주 업계에서 맥주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브루어리펍(맥주 제조와 판매를 같이 하는 펍)을 여는 것이 목표예요. 지금 하고 있는 맥주 수입판매업을 좀 더 확대시켜 세계의 400~500종류 맥주를 직접 직영점처럼 생맥주 공급을 하는 거죠. 특히 제가 비어소믈리에니까 다양한 맥주의 특성에 맞게 직접 안주를 매칭해서 최상의 맥주를 맛볼 수 있도록 운영할 예정이예요.



맥주를 잔에 따르는 것부터 잔에 담긴 맥주의 시향까지 꼼꼼하게 테이스팅해보는 그의 모습.


지금의 사업을 하면서 무엇보다 가장 좋은 점은 ‘시간의 자유’예요. 이전 직장에서 일할 땐 와이프와 맞벌이로 일하니까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못 보냈거든요. 특히 새벽에 출근할 때 살금살금 나가다가 잠든 아이를 툭-쳐서 깨기라도 하면 “아빠 가지마”라며 한참을 우는데 제대로 달래주지 못하고 나가야 하니까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지금부터는 한 가정의 가장이자 아빠로서 가족들에게 더 집중하고 싶어요. 얼른 아이들이 커서 온 가족이 저희 가족만의 특별한 맥주를 즐길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글·영상·사진=정가람기자 garam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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