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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랜드 금광…축복인가 재앙인가





달러와 랜드.* 미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화폐 단위다. 세계의 수많은 통용 화폐 가운데 둘 만의 공통점이 있다. 둘 다 화폐의 이름이 지명(地名)에서 나왔다. 무게(파운드)나 형태(원·위안·엔), 또는 귀금속을 뜻하는 게 보통인 화폐 단위에 땅 이름이 들어간 이유는 간단하다. 땅에서 돈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거대한 금광과 은광이 발견된 지역의 이름이 화폐 단위로 자리 잡았다는 얘기다.

랜드(Rand) 역시 광산 이름에서 나왔다. 아프리카 남쪽의 위트워터스랜드(Witwatersrand) 금광(金鑛)의 줄임말. 1961년 5월,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한 국제 제재에 동조하는 영국에 반발해 영연방을 탈퇴하면서 ‘남아공 파운드’를 버리고 ‘랜드’를 화폐 단위로 골랐다. 랜드, 즉 위트워터스랜드는 본래 백인들의 거주지가 아니었다. 줄루족의 터전을 네덜란드계 백인 후손들이 빼앗은 땅이었다.

네덜란드계 백인 집단 역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 곳에 왔다. 네덜란드인들이 살던 곳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 부근. 아시아항로를 개척하면서 케이프타운을 눈여겨 본 네덜란드인들은 1650년대부터 이주를 시작해 토착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신교인 캘빈주의 교리와 전통을 고집스레 지키며 농부로 살아왔다. 양모를 주로 수출하던 이들은 네덜란드어로 ‘농부’라는 의미인 ‘보어(Boer)인’으로 불렸다.

변화가 몰아 닥친 것은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이후부터. 나폴레옹 군대의 이집트 점령으로 인도까지 위협 당할 수 있다고 걱정한 영국은 1796년 ‘전략 요충지 케이프타운’을 점령해버렸다. 영국은 처음 빼앗은 남아프리카를 곧 되돌려 줬으나 1806년 두 번째 점령 이후부터는 눌러앉았다. 영국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보어인들은 대거 내륙 북부 지방으로 떠났다. 19세기 중반 보어인들은 원주민들을 총칼로 내쫓고 트랜스발 공화국(1852년 독립)과 오라녜(오렌지) 자유국(1854)을 세웠다.

같은 혈통과 풍속을 갖고 있으면서도 각기 다른 나라로 독립한 이유는 영국에 대한 성향이 달랐기 때문. 반영 감정이 보다 강했던 트랜스발 공화국은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된 1867년부터 영국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다. 1877년 영국령에 강제 편입됐던 트랜스발 공화국은 1차 보어전쟁(1880)을 통해 독립을 되찾았으나 기쁨도 잠시. 1883년부터 금광이 잇따라 발견되며 ‘골드 러시(Gold Rush)’의 광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침 1848년 미국 캘리포니아 금광 발견 이후 로스차일드 등 세계의 자본이 광산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던 상황이었다. 영국의 자본과 기술진, 광부들이 몰려들었다. 트랜스발 공화국은 달갑지 않았다. ‘농업국가로 경건하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에 애써 금광 발견 소식을 숨겼다. 하지만 1886년 초 발견된 위트워터스랜드(이하 랜드) 금광은 규모가 커도 너무 컸다. 소문이 소문을 타고 번져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트랜스발 공화국 파울 크루거 대통령은 1886년9월20일, 랜드 금광의 존재와 개발 계획을 발표하며 단서를 달았다. 개발을 허용하는 조건의 핵심은 개발 방식. 크루거 대통령은 ‘공영 개발’ 방식을 내걸었다. 물 밀듯 들어올 게 뻔한 영국계 자본과 채광업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국가가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크루거 대통령은 금광 개발로 철도를 깔고 트랜스발을 근대국가로 변모시킬 요량이었다.

내국인의 힘으로 금광을 꾸려나가겠다던 크루거의 소망은 이뤄졌을까. 희망 사항에 그쳤다. 공영 개발 발표 직후, 랜드 금광의 본줄기가 발견되며 더욱 많은 영국인들이 찾아왔다. 거대 금광의 존재와 공영개발 방침을 밝힌 크루거 대통령의 발표 4년 뒤, 랜드는 보어인 인구보다 많은 4만여명의 노다지꾼들로 흥청거렸다. 1892년 랜드 금광은 33t의 금을 산출하며 세계 금 생산(220t)의 15%를 차지했다. 1898년에는 금 118t을 쏟아냈다.**

쿠르거 대통령은 금 생산이 폭증하는 초기부터 ‘금이 이 나라에 피를 부를까 두렵다’고 우려했다. 그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자수성가한 광산업자 출신으로 자기 이름을 딴 사설 식민국가 ‘로디지아(오늘날 짐바브웨)’를 세워 총독을 맡고 있던 영국인 세실 로데스는 사병(私兵) 500명을 동원해 통째로 금광을 먹으려 들었다. 1896년 트랜스발을 침공한 로데스의 사설군대는 전원 체포됐다. 그러나 트랜스발의 비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영국은 겉으론 로데스의 무모함을 비난하면서도 속으론 주판알을 굴렸다. 영국의 식민장관 체임벌린과 케이프타운 고등판무관 밀러는 랜드 금광 노동자의 투표권을 보장하라고 크루거를 밀어 부쳤다. 이미 랜드 지역의 외국인 숫자가 보어인보다 훨씬 많아진 상황. 크루거는 수용할 수 없었다. 영국의 강압과 크루거의 저항은 끝내 1899년 제 2차 보어전쟁 발발로 이어졌다.

보어전쟁에서 영국은 곤욕을 치렀다. 야만의 행태도 드러냈다. 당시 트랜스발과 오렌지자유국 등에 살던 보어인 인구는 모두 50만여. 병력 7만으로 게릴라전을 펼치는 보어군을 상대로 영국은 45만명을 투입한 끝에 겨우 이겼다. 영국은 게릴라의 근거를 없앤다며 보어인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전략을 썼다. 강제수용소에 갇힌 여자와 어린 아이 21만명 가운데 2만여명이 병들거나 굶어서 죽는 참상에 영국은 세계의 비난을 받았다.



영국이 ‘근대 이후 문명 백인이 백인을 상대로 약탈에 나선 최초의 사례’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잔인하게 전쟁을 치른 이유는 여기에 있다. 금(金)과 다이아몬드.

일찍이 ‘과소 소비와 저축이 위기를 낳는다’(산업생리학·1889년)고 간파해 ‘케인즈 이전의 케인즈’로 불린 경제학자 존 홉슨(John A. Hobson:1858~1940)은 보어 전쟁을 맨체스터 가디언지의 특파원 신분으로 지켜본 뒤 *** 명저 ‘제국주의론(1902)’을 지었다. 홉슨은 ‘제국주의론’에서 ‘과소 소비-저축-과잉 생산’으로 이어지는 위기가 해외투자로 시작돼 침략과 전쟁을 낳은 금융제국주의로 풀렸다고 봤다. 레닌이 1916년 펴낸 ‘제국주의론’도 홉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다.

금과 다이아몬드를 탐낸 영국의 야욕을 지켜본 다른 나라들도 앞 뒤 가리지 않고 제국주의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열강의 노골적인 세력 확대 경쟁은 아프리카 분할경쟁으로 이어져 1차대전의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여기에 이르러 질문을 아니 던질 수 없다. 유사 이래 최대의 금광이라는 위트워터스랜드 금광의 발견은 축복이었나. 아니면 비극이었나.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달러의 어원은 요아힘스탈 그로센(Joachimsthal Groschen). 요아힘 언덕에서 나온 돈이라는 뜻이다. 요아힘은 1520년 보헤미아 왕국에서 거대한 은(銀) 광산이 발견된 지역. 오늘날 체코의 야히모프(Jachymov)인 요아힘에서 캐낸 은으로 주조한 돈의 이름이 요아힘스탈 그로센, 탈러 그로센(Taler Groschen), 요아힘스탈러(Joachimsthaler)를 거쳐 탈러(Taler)라는 줄임말로 굳어졌다.

탈러는 중부 유럽을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왕가와 스페인 지역의 왕실들이 수차례 정략 결혼으로 이룬 스페인 제국의 교역망을 타고 세계로 퍼졌다. 독립 전쟁에서 승리한 신생 미국은 옛 식민 모국인 영국의 경제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운드화를 버리고 중남미에서 쓰이던 스페인 ‘다레라’은화에서 기준 통화의 이름을 찾았다. 탈러와 다레라, 달러는 독일어와 스페인어, 영어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단어다.

** 랜드는 금을 끊임없이 토해냈다. 지금까지 약 5,000억 달러 어치의 금을 캐냈으나 남아공은 아직도 전체 매장량의 절반이 남았다고 주장한다. 다만 남아공은 각종 자원을 아끼고 있다. 지난 2014년 기준으로 전세계의 금생상산량은 모두 2,994t. 중국이 450t으로 부동의 1위다. 호주(274t)에 이어 러시아(247t), 미국(210t), 캐나다(152t) 등이 5위권에 들어 있고 남아공은 캐나다에 약간 못미치는 수준으로 6위다. 지난 1970년 1,000t의 금을 캐내 세계 생산량의 74%를 차지한 이래 남아공은 부존 자원 채굴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각국 중앙은행의 금 보유량은 미국이 8,133.5t으로 1위, 독일이 3,378t으로 2위, 국제통화기금(IMF)가 2,814t으로 탑 3인 가운데 이탈리아(2,451.8t), 프랑스(2,435.8t), 중국(1,823.3t), 러시아(1,98.7t), 스위스(1,040t), 일본(765.2t), 네덜란드(612.5t) 순이다. 대한민국은 104.4t으로 멕시코(30위), 리비아(31위), 그리스(32위) 아래인 33위다. 한국의 대외 지불자산 가운데 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1%로 비교 가능한 40개국가 중에서 가장 낮다.

*** ‘산업생리학’에서 ‘저축이 번영의 토대를 침식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힌 뒤 홉슨은 학계의 이단아로 몰렸다. 급기야 런던대학교 교수직까지 해임(31세)된 이후 82세로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기고와 사회비평으로 보낸 그는 20세기 경제학의 흐름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케인스 유효수요이론의 원형이 ‘과소 소비론’에 있다.

홉슨을 교수직에서 짤리게 만든 문제의 주장은 이렇다. ‘부자는 너무 많아 쓰지 못한다. 고전적인 해답은 쓰이지 못한 돈이 저축을 통해 공장과 생산에 투자돼 더 많은 산출을 가져온다고 설명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물건이 팔리지 않는 상황에서 투자해봐야 새로운 소비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홉슨은 국내 잉여를 바깥에 투자하려는 국가가 하나둘이 아니었기에 금융 제국주의 경쟁이 일고 종국에는 전쟁으로 번졌다고 봤다. 홉슨이 영향을 미친 케인스 경제학은 물론 레닌의 사회주의는 진작에 힘을 잃었지만 유독 금융제국주의만큼은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윈스턴 처칠도 보어전쟁 종군 특파원으로 이름을 알린 케이스다. 마땅한 전공을 올리지 못해 고민하던 그는 보어전쟁이 발발하자 군인이면서도 모닝 포스트지의 특파원 신분으로 종군했다. 보어군에게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 갇혔으나 탈출, 480㎞를 뚫고 생환한 그는 영국 최고훈장인 빅토리아 무공훈장을 받고 명성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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