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잠잠하던 개헌론이 최근 여권을 중심으로 다시 불거져 나오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친박계인 새누리당 지도부와 청와대가 개헌을 놓고 엇박자를 보이면서 궁금증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지금은 개헌을 말할 때가 아니다”라는 청와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연일 개헌의 불을 지피는 여권 주류의 속내는 도대체 무엇일까.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11일 우윤근 국회 사무총장과 당 원내대표실에서 약 20분간 예정에 없던 비공개 회동을 했다. 정진석 원내대표는 회동 후 “특별한 대화는 없었다”면서도 “(대표적 개헌론자인) 우 총장과 개헌 얘기를 좀 나눴다”고 전했다. 전날 청와대가 개헌 논의에 제동을 거는 모양새를 취했음에도 정진석 원내대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불 지피기’를 멈추지 않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당청이 표면적으로는 의견이 충돌하는 듯한 양상을 보였지만 실제로는 적절한 ‘역할 분담’에 나섰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청와대는 당장 국정운영 동력 약화를 우려해 2선으로 물러서 있는 대신 여당 지도부가 청와대를 대신해 개헌의 불씨를 살려놓겠다는 의중이라는 것이다.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날 “청와대·새누리당의 집권 연장을 위한 정략적 정치 플레이에 야당이 놀아날 수 없다”고 꼬집은 것 역시 집권여당의 이 같은 전략을 간파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서울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청와대가 특정 시점에 ‘차기 정권 창출에 대한 영향력 과시’를 위해 개헌 논의에 뛰어들 가능성이 높다”며 “이는 국가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차원이 아니라 철저한 정치공학적 계산에 따른 것이다. 결국 개헌을 바라보는 여권 주류의 속마음에는 권력 수성(守城)에 대한 불안이 깔려 있는 셈”이라고 분석했다.
김형준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본지와의 통화에서 “대한민국 대선사(史)는 곧 개헌을 둘러싼 갑론을박의 역사였다”며 “지금은 ‘블랙홀’ 운운하는 현 정권도 내년이 되면 친박계를 내세워 개헌 카드를 꺼낼 것”이라고 예측했다.
여권의 마땅한 대권 주자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친박계가 사실상 당 바깥의 인물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목을 매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이 같은 전망에 더욱 힘이 실린다. 반기문 총장이 최종적으로 ‘새누리’ 간판을 달고 대통령에 당선된다고 가정해도 그가 친박계, 더 나아가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앞날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친박계가 일찌감치 ‘반기문 대통령-친박 총리’의 이원집정부제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문제는 개헌의 현실화 가능성이다. 여야는 물론 여권 내에서도 주류·비주류가 정치공학에만 매달릴 경우 말만 무성했던 개헌 논의가 이번에도 무위에 그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박계인 김성태 새누리당 의원은 이날 개헌론의 주도권을 친박에 빼앗길 수 없다는 듯 “내년 4월 국민투표를 하자”고 주장하며 피 튀기는 ‘개헌 전쟁’을 예고했다. 김형준 교수는 “반기문 총장도 속내가 뻔히 들여다보이는 청와대의 전략을 곧이곧대로 수용하기 힘들 것이다. 오는 2018년에 새로운 대통령이 들어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개헌 논의는 쏙 들어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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