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10월20일 페루 중부 도시 앙콘. 수도인 리마를 빼앗긴 페루와 기세 등등한 칠레가 앙콘조약(Treaty of Ancon)을 맺었다. 골자는 페루 영토의 칠레 할양을 조건으로 하는 태평양전쟁의 종결.* 1879년부터 4년간 계속된 전쟁은 끝났지만 페루는 남부 지역의 영토를 잃었다. 페루와 동맹이었던 볼리비아도 이듬해 칠레와 조약을 맺고 해안지역을 내줬다. 볼리비아가 바다와 접하지 못한 내륙국가가 된 게 이 때부터다.
전쟁의 원인은 새똥과 칠레 초석. 페루 연안 섬에 수백미터 높이로 쌓인 새들의 배설물 퇴적층, 구아노(Guano) 때문이다. 천연비료로써 가치가 규명된 1840년대 이후 페루는 돈벼락과 날벼락을 차례로 맞았다. 먼저 호황이 찾아왔다. 구아노 수출로 연평균 9%씩 경제가 성장하는 호황 가도를 달렸다. 도로와 철도, 건물이 속속 들어서는 호황은 오래 못 갔다. 영국 등의 훈수에 따라 대자본을 투자한 설탕 플랜테이션의 실패 탓이다.
채무불이행까지 선언하는 공황에 빠진 페루는 원자재 수출 가격 인상을 추진했다. 마침 페루 남부와 볼리비아 국경지대에서 보다 큰 구아노 집적지와 화약의 원료인 칠레 초석 광산까지 발견된 상황. 페루는 국유화를 선언하고 경제재건에 나섰다. 페루와 칠레 사이의 볼리비아도 페루와 생각이 같았다. 칠레와 유럽 자본에게 내준 아타카마 사막의 개발 및 운영권을 회수할 계획을 세웠다. 칠레인 광산회사에 대한 수출 관세도 대폭 올렸다.
칠레는 즉각 반발했다. 1879년 2월 볼리비아 영토이며 자원의 보고인 안토파카스타주로 쳐들어갔다. 당시 세 나라의 병력은 페루 8,000여명, 볼리비아 3,100명, 칠레 2,500명 수준. 칠레가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병력도 적은데다 페루와 볼리비아는 비밀군사동맹까지 맺은 사이였다. 칠레가 1대 4 이상의 병력 열세에도 먼저 선수를 친 이유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 자본의 지원.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 독일, 이탈리아 유럽 국가들은 페루와 볼리비아의 자원 국유화를 힘으로 누르려 들었다. 남미산 구아노를 대체할 비료를 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수입 가격을 올려줄 생각은 더 더욱 없었다. 결국 유럽 각국의 지원 약속을 받은 칠레는 적은 병력에도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의 양상은 일방적으로 진행됐다. 초전에 페루 해군이 반짝 승전을 기록했을 뿐, 페루와 볼리비아 두 나라는 연전연패의 수렁에 빠졌다.
영국에 해군, 프랑스에 육군을 훈련받고 미국제 군수물자로 무장한 칠레는 순식간에 남미의 패자로 떠올랐다. 미국계 중국인이 대거 칠레로 이민한 것도 이때다. 페루는 안에서도 무너졌다. 전쟁 통에 초석 생산과 수출이 막혀 경제가 더 나빠지고 수도 리마에서 약탈 행위까지 일어났다. 대통령은 자본과 무기를 구해온다며 유럽으로 도망가 돌아오지 않고 군대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미국이 중재한 정전 협상이 지리하게 이어지자 칠레군은 1881년 1월 페루의 수도 리마를 점령해버렸다. 페루와 볼리비아 군대의 일부가 산악에 숨어 게릴라전을 펼쳤으나 소용없었다. 전쟁에 지친 페루 국민들은 종전을 원했다. 결국 페루는 천연자원의 보고인 타라파카, 아리카 지역을 칠레에 떼줬다. 볼리비아도 막대한 지하자원이 묻힌 안토파카스타주를 통째로 잃었다. 볼리비아 영토 가운데 바다에 인접한 유일한 지방이던 안토파카스타주 상실로 볼리비아는 해안이 없는 내륙국가로 전락했다.
칠레는 두둑이 챙겼다. 전쟁배상금으로 받은 금화만 2,000만 페소. 무엇보다 오늘날 국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금싸라기 자원지대를 영토로 편입시켰다. 하지만 칠레의 기쁨도 오래가지 않았다. 페루와 비슷한 길을 밟았다. 반짝 호황 뒤 경제 위기가 찾아왔다. 자원 국유화를 선언하자마자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반란군의 쿠데타로 정권이 뒤집혔다. 유럽과 미국이 사주한 자원확보 전쟁의 끝은 남미 3개국 모두의 파탄이었다.
새똥과 화약 원료를 둘러싼 태평양전쟁의 총성이 멎은지 133년이 지나도록 전쟁 당사국들의 감정 대립은 여전하다. 남미의 맹주였던 페루는 이 전쟁에서 패한 이후 단 한 번도 이전의 영광을 찾지 못했다. 볼리비아는 세계 2위의 천연가스 매장국인데도 빈국으로 분류된다. 수출 항구가 마땅치 않아 개발이 지연된 탓이다. 칠레도 비극적 침탈을 겪었다. 선거로 뽑힌 아옌데 칠레 대통령은 구리 광산 국유화를 선언하며 경제 자립을 추진하다 미국이 사주한 군부 쿠데타로 1973년9월11일 총맞아 죽었다.
부정축재와 독재로 칠레의 역사를 더럽힌 피노체트가 바로 ‘칠레의 9.11’을 통해 정권을 잡았었다. 미국 시카고 학파 경제학자들은 독재자 피노체트 밑에서 신음하는 칠레에 신자유주의 경제를 심었다. 세 나라는 국제사법재판소 등을 통한 소송전을 벌이고 있다. 경제가 좀 나아진다 싶으면 미국과 유럽제 무기를 사들인다. 언젠가는 복수하겠다는 것이다. 남미를 피로 물들였던 태평양전쟁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는지도 모른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태평양전쟁’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2차 대전기간 중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지칭하지만 남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페루와 볼리비아 동맹이 칠레와 1879년부터 1883년까지 영토와 자원을 둘러싸고 펼친 전쟁을 태평양전쟁이라고 부른다.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어에서도 두 개의 태평양전쟁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는다. 다만 영어에서는 표기 차이가 있다. 남미 국가들의 19세기 태평양전쟁은 ‘War of the Pacific’으로, 미국과 일본 간 20세기 태평양전쟁은 ‘the Pacific War’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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