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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갈라먹기…1884년 베를린 회의





1884년11월15일 베를린. 유럽 12개국과 미국 오스만 투르크 등 14개국이 한 테이블에 모였다. 아프리카 분할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개막 당일 유럽 언론들은 이렇게 썼다. ‘인간정신의 승리.’ 백인끼리 총칼로 싸우지 않고 대화를 통해 아프리카 주요 지역에 경계선을 그었으니 휴머니즘의 극치라는 의미에서다. 땅의 주인인 원주민은 안중에도 없었다.

제국주의 팽창기에 각국이 머리를 맞댄 이유는 곳곳에서 충돌이 발생해 조정이 필요했기 때문. 콩고 분지를 둘러싼 각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맞섰다. 미국의 기자 겸 탐험가 헨리 스탠리를 앞세운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1881년에 콩고강 유역을 개인 식민지로 삼았다. 프랑스도 해군을 보내 콩고강 유역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영국을 포르투갈과 손잡고 자유 교역권을 얻었다.

세계 최강 영국이 후발주자로 끼어들자 벨기에와 프랑스는 포르투갈을 압박해 결국 국제회의가 열렸다. 유럽의 신흥 맹주로 떠오른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가 ‘평화적이고 명예로운 중재’를 자처하며 베를린에 각국 대표를 모았다. 11일 동안 이어진 베를린 회의는 ‘콩고분지조약’이라는 결과물을 내놓았다. 최대 수혜자는 벨기에. 경쟁이 치열했던 중앙아프리카 일대가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영토로 인정 받았다. 프랑스도 기득권을 인정받았다. 비스마르크는 노골적으로 프랑스와 벨기에 편을 들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에서 패배한 이후 복수의 기회를 노리는 프랑스의 시선을 아프리카로 돌리자는 의도에서다.

각국은 이미 진출한 지역의 기득권을 서로 보장했으나 문제는 경합지역. 논란 끝에 소유가 불분명한 곳은 실효지배 여부로 판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실질적으로 점령하고 있어야 식민지로 인정한 것이다. 포르투갈의 영유권은 이로 인해 인정받지 못했다. 영국의 불만은 다른 대안을 낳았다. 콩고강 유역에 대한 모든 국가의 교역 및 선박 운항의 자유를 보장한 것이다.

베를린 회의는 안정을 가져왔을까. 정반대다. 유럽의 약소국 벨기에가 아프리카 한복판 노른자위인 콩고 분지를 차지한 이후 각국은 실효 지배에 매달렸다. 국가 간 분쟁이 생기면 ‘백인들끼리 싸우지 않고 명예롭게 합의한 베를린 회의의 전통’에 따라 위도와 경도를 중심으로 경계선을 그었다. 아프리카 주요국가의 국경선이 아직도 일직선인 것도 이 시기의 유산이다. 실효 지배를 위한 경쟁이 심해지면서 20세기 초 아프리카 대륙에 원주민이 세운 독립국가는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미국의 개인회사가 흑인들을 아프리카로 돌려보내겠다며 세운 국가) 단 두 곳밖에 남지 않았다. 베를린회의는 아프리카를 나눠 먹는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어느 곳보다 심한 고통을 강요 당한 지역은 레오폴트 2세의 사적 식민지로 전락한 콩고 일대. 벨기에 본토보다 80배나 큰 땅을 차지한 백인 식민주의자들은 악랄하게 원주민을 짜냈다. 폴란드 출신 영국 작가 조셉 콘라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에 나오는 악마적인 인물 ‘커츠’처럼 상아를 얻기 위해 원주민을 파리처럼 죽였다. 자연과 생태계도 파괴됐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코끼리 송곳니 한 쌍에서 나오는 50㎏의 상아로 가공한 피아노 건반이 선사하는 운율을 우아하게 즐겼다. 상아 하나면 수 천개 의치(義齒)를 만들 수 있었으니 수요는 무궁무진했고 아프리카는 속부터 망가졌다.

상아 다음에는 고무가 비극을 불렀다. 1887년 상아(80만 벨기에 프랑), 야자나무 열매, 야자유, 천연고무(12만 벨기에 프랑) 순이었던 콩고 지역의 수출품 가운데 고무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1895년에 288만 벨기에 프랑, 1899년에는 2,810만 벨기에 프랑으로 뛰었다. 미국인 발명가 찰스 굿이어가 1839년 발견한 가황처리법으로 각종 기계류의 충격흡수재는 물론 자전거와 자동차용 바퀴 수요가 급증하며 고무 수요도 기하급수적으로 뛰었다.

레오폴트 2세의 하수인들은 고무 채취 할당량을 못 채우는 원주민들의 손발을 잔인하게 잘랐다. 아담 호크쉴드 교수(UC버클리대)는 저서 ‘레오폴드왕의 유령’을 통해 벨기에가 이 지역에서 학살한 원주민을 1,000만명으로 추산한다. 철저하게 수탈 당했던 콩고 비극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콩고와 르완다 일대는 20세기 초반까지 지역 간, 종족 간 분쟁이 없던 지역이었으나 벨기에가 식민 통치를 위해 분열책을 쓴 결과 종족 간 증오심이 뿌리내렸다. 걸핏하면 인종 청소 전쟁이 일어나고 상대방의 손목을 자르는 야만적인 행위는 제국주의가 남긴 악습이다.

베를린 회의 132주년. 아프리카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국경을 긋고 자연 부족을 흩어놓은 후유증으로 강이나 산맥을 따라 형성되는 전통적 단위경제권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의존도만 높아져 간다. 직선 국경으로 같은 종족도 다른 나라로 갈렸다.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고도 기아에 허덕이는 최빈국들이 즐비하다.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신음이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제국주의 압제에 협조했던 아프리카의 부역자들은 독립 이후에도 자본가와 지배층으로 변신해 대대로 부를 세습한다. 친일 반역의 시대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와 구조가 비슷하다. 온 국민이 반대하는 데도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을 강행하는 배후에 도사린 나라의 입김으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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