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18년 정치인생에 오점을 남기게 됐다. 헌정사상 두 번째로 국회의 탄핵을 받은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 것이다.
지난달 24일 문건유출 의혹을 담은 ‘최순실 태블릿PC’ 보도 이후 46일 만에 국가 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권한 행사가 정지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1998년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후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곧은 이미지와 정치적 자산을 토대로 2013년 2월 우리나라 첫 여성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여의도 입성 15년 만에 정점을 찍은 것이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에도 30%대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기반으로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펼쳐왔다.
하지만 집권 4년 차에 터진 ‘최순실 게이트’는 박 대통령을 역대 대통령의 통상적으로 겪는 레임덕 수준을 넘어 국민으로부터 즉각 하야 요구를 받는 초유의 상황으로 내몰았다.
박 대통령이 지난달 4일 대국민담화에서 언급했듯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줬기 때문에 스스로 경계의 담장을 낮추었다”던 최순실씨에게 발목이 잡혀 더 손써볼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1997년 11월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에 입당하면서 정치를 시작했다. 1979년 10월26일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칩거생활을 해오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방관할 수 없다며 대중 앞에 나선 것이다.
이듬해인 1998년 4월 박 대통령은 대구 달성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뒤 정치인으로 본격 데뷔, 19대 때까지 5선 의원을 지냈다.
미래연합 창당 등 혼란기를 거쳐 박 대통령이 유력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시점은 2004년부터다. ‘차떼기’로 상징되는 불법대선자금 사건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으로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이다.
이때부터 박 대통령은 2년3개월 동안 당 대표를 지내며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와 지방선거 등에서 당시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40대0’이라는 완승을 거뒀다.
‘선거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면서 유력 대권주자로 발돋움한 박 대통령은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다. 하지만 서울시장 출신인 이명박 후보와의 접전 끝에 패배했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는 연설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박 대통령은 17대 대선과 18대 총선을 거치며 당내 비주류로 전락한 친박(친박근혜)계를 이끌었고 2009∼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 때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원안을 고수해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키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이때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더욱 확고하게 다졌으며 이는 2012년 대선 승리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집권 4년 차에 터진 최순실 파문은 박 대통령의 18년 정치인생을 뿌리째 흔들었다. 풍문으로 나돌던 박 대통령과 최 씨와의 관계가 확연히 드러났고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왔다.
박 대통령은 그간 세 차례 담화를 통해 “1998년 정치 시작부터 오늘까지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마음으로 모든 노력을 다해왔다.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호소했으나 분노한 촛불민심은 대통령 즉각 퇴진을 외쳤다.
국회 탄핵으로 모든 권한을 상실한 박 대통령의 마지막 기회는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절차가 될 것으로 보인다. 최장 180일이 걸리는 탄핵심판의 법리싸움에 18년 정치인생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1년 5·16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지 ‘18년’ 만인 1979년에 측근인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맞아 서거한 데 이어 박 대통령도 정계 입문 ‘18년’ 만에 측근인 최순실씨에게서 촉발된 게이트로 대통령 권한이 정지되는 비운을 맞게 된 것도 아이러니다. /맹준호기자 nex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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