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슬퍼질 때마다 야한 생각을 해.”
도발적인 대사의 주인공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야한 여자”라는 안나다. 남자의 아내가 되는 게 여자의 덕목이던, ‘여자이기 때문에 안되는 게’ 많았던 19세기 영국 빅토리아시대, 솔직하고 당당한 내가 되고 팠던 한 여인의 성장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름부터 매혹적인 뮤지컬 ‘레드북’이다.
레드북은 ‘2016 공연예술 창작 산실 우수신작’ 선정작으로, 2013년 소극장 창작뮤지컬 신화를 쓴 ‘여신님이 보고계셔’의 한정석 작가와 이선영 작곡가가 4년 만에 선보인 신작이다.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안나가 첫사랑과의 야한 추억을 바탕으로 쓴 소설 ‘레드북’을 펴내며 세상 편견에 맞서 성장하고, 이 과정에서 진실한 사랑도 쟁취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엉뚱한 소설가인 여주인공이 고난을 극복하고 주체적인 존재로 거듭난다는 ‘영웅 신화’에 고지식한 변호사와 티격태격하다 사랑에 빠진다는 로맨틱 코미디가 더해졌다. 뻔한 줄거리를 새롭게 만드는 것은 주·조연 할 것 없이 개성 강한 캐릭터다. 약혼자 앞에서 첫 경험을 고백했다가 파혼당해 도시로 건너온 안나, 고지식한 모태 솔로 변호사 브라운, 고품격 여성 문학학회(를 표방하지만, 욕망의 표현에 심취한) ‘로렐라이 언덕’의 수장인 여장남자 로렐라이, 변태 문학평론가 존슨… 색깔 강한 인물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유쾌한 무대를 빚어낸다. 여기에 ‘입 밖에 내면 경박하다’며 억눌러 온 ‘성’(性)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와 풍자를 쏟아내며 새빨간 웃음과 감동을 선사한다. 맑은 음색의 유리아는 사랑스러운 안나 캐릭터를 몸에 맞는 옷처럼 잘 소화해냈고, 그동안 어두운 배역을 주로 맡아왔던 박은석과 지현준은 각각 브라운, 로렐라이를 연기하며 관객에게 웃음 폭탄을 선사한다. 안나를 하녀로 고용했던 브라운의 할머니 바이올렛과 로렐라이 언덕 회장 도로시를 1인 2역 하는 김국희의 코믹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 8인조 라이브 밴드의 풍성한 음악까지 더해졌으니 아쉬울 게 없다.
신작임에도 비교적 탄탄한 구성과 높은 완성도 덕에 150분(인터미션 포함 165분)의 러닝 타임이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묵직한 교훈 보다는 유쾌하고 발칙한 스토리 만으로 충분히 힐링되는 마성의 빨간 책은 22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펼쳐볼 수 있다. /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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