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의 마지막 나날을 적나라하게 다룬 영화 ‘몰락’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소련군의 포격이 베를린 시가지를 폐허로 만들고 독일군은 포위당하기 직전이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슈타이너 장군이 패잔병들을 재결집해 지도부를 구하러 오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히틀러는 사기가 땅에 떨어진 병사들이 수행할 수 없는 작전이라는 참모들의 의견을 묵살한다.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나서야 비로소 히틀러는 자신의 몰락을 직시하고 뒤늦은 분노 발작을 일으킨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 부른다. 이에 따르면 대부분 사람들이 본인의 신념에 부합하는 사실만을 보려 하고 반대되는 정보에 맞닥뜨리더라도 어떻게든 본인의 믿음을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해석하려 한다고 한다. 연애 초반 두 눈에 콩깍지가 쓰이는 현상에서부터 나아가서는 독재자의 신념이 불통과 억압으로 귀결되는 수많은 독재국가에 이르기까지 확증 편향의 예는 우리 주위에 너무나도 많다.
기업 경영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이러한 확증 편향이 과도한 자신감(overconfidence)과 결합하면 기업 경영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신감이 과도한 최고경영자일수록 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을 과대평가해 지나친 차입경영을 선택하고 인수합병(M&A)을 자주 추진한다는 점, 또한 이러한 M&A들이 대부분 회사의 가치를 저해시킨다는 점 등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다.
따라서 경영진의 확증 편향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는 다양한 시각이 자유롭게 표출될 수 있도록 이사회의 인적 구성과 의사 진행에 공을 들이는 것이다. 반대로 비슷한 사고방식과 편향을 가진 사람들만으로 이사회를 꾸리면 최고경영진의 확증 편향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물론 세상 어디에도 듣기 싫은 소리를 즐기는 사람은 없다. 천하를 호령한 군주와 고언을 아끼지 않은 명재상의 조합으로 널리 알려진 당 태종과 위징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위징이 죽자 당 태종이 그의 장례를 후하게 치른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당 태종이 쌓인 분을 이기지 못해 위징의 묘비를 쓰러뜨린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위징 생전에 받은 스트레스가 극심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회에서 소통과 토론을 장려하고 또 필요하다면 경영진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은 기업 가치 제고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위징과 같은 꼿꼿한 사람들로만 이사회를 채우라는 뜻은 아니지만 이사회의 인적 구성은 반드시 대내외적으로 발생하는 현상과 사건에 대해 다양한 시각을 제공할 수 있도록 이뤄져야 한다.
일례로 2,700여개 미국 기업을 대상으로 연구한 플로리다대의 이종섭 교수 연구진의 최근 논문에 따르면 최고경영자(CEO)와 이사진 간의 정치적 성향이 비슷한 기업일수록 주주 가치가 낮아진다고 한다. 비슷한 정치이념으로 똘똘 뭉쳐 집단사고(groupthink)에 노출된 이사회보다는 다양한 정치적 관점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편이 주주 가치 제고에 도움이 된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집단사고가 무서운 것은 종종 그 시발점이 당사자들조차 인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소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하버드 비즈니스스쿨(MBA) 입학생들의 경우 입학성적과 상관없이 무작위로 10개 학급 중 하나에 배정된다. 켈리 슈에 시카고대 교수가 이들의 졸업 후 경력을 추적해봤더니 같은 연도에 MBA를 졸업한 동기들 중에도 같은 학급에 배정된 이들이 경영자가 됐을 때 보이는 특성이 다른 학급 동기들에 비해 훨씬 더 비슷하다고 한다. 무작위로 배정됐음에도 말이다.
아마도 성공한 CEO일수록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확신은 더 크고 자신감 또한 최고조일 것이다. 그럴 때일수록 주위 사람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못했던 이들의 말로는 이미 역사에 잘 드러나 있다. 위징이 죽고 채 3년이 지나기 전 당 태종은 무리한 고구려 원정에 나섰고 결국 안시성에서 통한의 눈물을 삼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