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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엄정한 판단이 나라를 살린다





카를로 첸(Carlo Zeno). 이탈리아 베니스가 특별하게 기억하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영웅이다. 숙적 제노아의 공격으로 패망 일보 직전인 베네치아를 구해낸 구국의 영웅. ‘베니스의 사자(獅子)라고 불리며 시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베니스가 수많은 전쟁 영웅 가운데서도 그를 특별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영웅인 카를로의 작은 불법 혐의마저 재판대에 올리고 끝내 중형을 내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카를로는 억울했지만 법원의 조사와 판결에 순응해 더욱 존경받았다. 카를로는 지하감옥에서 형을 살았지만 건강하고 정의로운 베니스의 상징으로도 추앙받고 있다.

카를로의 당초 진로는 성직. 베니스 공화국의 최고 지도자인 ‘국가 원수(Doge)’ 를 배출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상속과는 거리가 멀었다. 장남이 아니었던 탓이다. 상인 공화국인 베니스의 유력 가문들은 재산의 분산과 소멸을 막기 위해 장남에게만 유산을 넘기는 게 보통이었다. 카를로는 가문의 결정에 따라 파도바대학의 신학부에 진학했으나 도통 종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키 크고 잘생긴 외모의 신학생이던 카를로에게는 늘 여성이 넘쳤다. 당시 유행하던 도박을 좋아해 학비까지 날린 그는 주저 없이 집을 떠나 용병단에 들어갔다.

5년간 방랑 끝에 돌아와 집안이 준비한 그리스 서부 지역의 사제직에 앉았어도 그는 미사보다 주변의 이교도 투르크인과 싸우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결국 카를로는 성직을 버리고 상인으로 나설 채비를 하던 중 군사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여행 도중 제노아의 공격으로 함락되기 직전인 베니스인들을 도와 완벽한 승리를 이끈 그는 베니스 해군의 그리스 분견함대 18척을 지휘하는 사령관직을 맡았다. 승승장구하던 카를로는 44세 무렵에는 막강 베니스 해군의 2인자로 떠올랐다.

반면 베니스는 이 무렵 전란에 휩싸이며 위기를 맞았다. 지중해 교역권을 놓고 120년 동안 싸워온 제노아에 함락 당할 처지에 빠졌다. 제노아에 포위 당한 채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원정 나간 카를로의 제2함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절체절명의 베니스는 카를로가 귀항하고서야 반격을 펼치고 제노아에게 항복을 받아내며 길고 긴 싸움을 승리로 끝냈다. 카를로는 더욱 잘 나갔다. 해군 총사령관은 물론 군 최고사령관을 몇 번씩 역임하고 주요국 대사를 지내 외교관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베니스의 중책을 모두 섭렵한 카를로가 거치지 못한 공직은 딱 하나. 국가 원수 자리였다. 73세의 나이로 2인자 자리인 산 마르코 성당 감독관으로 근무하던 1405년, 그는 갑자기 체포돼 재판정에 섰다. 혐의는 뇌물 수수. 이웃인 파도바의 영주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의심을 샀다. 카를로는 빌려 준 돈을 받은 것이라고 해명했으나 증거가 없었다. 베니스는 공직자들이 외국에서 선물을 받으면 반드시 신고해야 하는 나라였다. 그는 뇌물죄와 신고를 하지 않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베니스 시민들은 그의 체포와 재판 회부를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시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에 대한 재판 과정은 거의 실시간으로 시민들에게 전파됐다. 그만큼 시민들의 관심이 컸다. 변호인단은 카를로가 국가 누란의 시기에서 군대 지휘관 또는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어느 누구보다 공헌했다는 점이 감안되어야 한다고 변론했다. 시민들도 동정 여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재판을 담당한 17인 위원회는 고민에 빠졌다. 고뇌가 클만 했다. 대부분 그와 함께 공직에서 일했거나 부하로서 전투에 참가했던 사람들이었으니까.



카를로에 대해 존경과 호의적인 감정을 갖고 있던 위원들 앞에서 변호사는 ‘조국에 대한 공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인재가 앞으로도 공화국의 미래에 참으로 유용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군사적 통솔력은 물론이요, 외국에도 널리 알려진 그를 오직(汚職) 의혹만으로 매장시켜 버린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고 아까운 일인가’라는 변론이 먹혀 들어가는 것 같았다. 가벼운 징벌로 흘러가던 위원회의 분위기는 어느 한 위원의 발언으로 확 바뀌었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인 일본 여류소설가 시오노 나나미의 ‘침묵하는 소수’에 이 장면이 소개된다.

“위원 여러분, 카를로 정도의 인물을 재판한다는 점 자체가 망설여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가 영웅이며 (국가 원수직을 맡을 수 있는)인재라는 점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인재는 이제 태어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두려워하는 나라에서는 태어나지 않을 것이요, 반대로 그와 같은 걱정을 잊고 단호히 판결을 내리는 나라라면 언제고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판결은 2년 징역에 공직 영구박탈. 카를로는 바로 지하감옥에 수감됐다. 카를로 자신은 물론 어떤 베니스 시민도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판결을 비난한 사람들은 오직 외국인들뿐이었다. 베니스인들은 조그만 과실로 카를로 같은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 질투심 많은 무리라고 비웃었다.

판결을 달게 받아들인 카를로는 지하감옥에서 2년 형기를 채운 뒤에 성지 순례를 다니고 문학과 철학에 빠져 유유자적한 여생을 보냈다. 그를 흠모해 모여드는 시민과 외국인의 방문도 줄을 이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베니스의 정치를 배후에서 쥐락펴락할 수 있었지만 결코 나서지 않았다. 1418년 3월8일 그가 죽었을 때, 베니스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시민들은 마음 속에서 나오는 존경과 애도로 그를 떠나보냈다.

카를로는 얼마나 해먹어서 최고권력의 눈 앞에서 감옥에 갔을까. 빌려줬다가 되돌려 받은 돈이라고 주장한 돈의 액수는 400두카트. 주택 한 채 가격이었다. 카를로가 나포했던 제노아 선박 가운데 50만 두캇 어치 물품을 실은 배도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정말로 ‘조그만 과실’이었다. 작은 도시국가 베니스가 무려 1376년(공화국으로서는 1100년)의 역사 동안 존속했던 저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국가 지도자의 엄격한 도덕률. 지배층에 속한 인물일수록 엄격한 잣대를 적용받았다. 611년 시차를 넘어 대한민국을 본다. 고질적 부정부패 속에 지도자와 대중의 거짓과 의심이 난무한다. 법의 엄정한 판단이 나라를 살린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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