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투명사회’ 등 우울한 현대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은 저서로 주목받고 있는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상식에 어긋난 강의 태도로 논란을 빚고 있다.
21일 출판계에 따르면 문학과지성사는 지난 17일 홈페이지를 통해 ‘한병철 강연회에 참석하셨던 독자님께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으로 공식 사과문을 게재했다. 지난 15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열린 한 교수 신작 ‘타자의 추방’ 출간 기념 저자 강연회로 물의를 빚은데 대해 사과한 것. 사과문에서 문학과지성사는 “강연자가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고 청중에게 무례한 발언을 하여 많은 분들이 불쾌감과 모욕감을 느끼셨을 것”이라며 “지금까지 한병철 교수의 강연회를 네 차례 기획한 바 있는데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독자들과 좋은 만남의 자리가 되리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참석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지난 15일 한병철 교수의 강연회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행사를 이틀 앞두고 강연회 시간을 한 시간 앞당겼으나 결국 강의 시작은 30분가량 지연됐고 질문자에게 “입을 다물라” “참가비 1,000원을 줄 테니 나가라” 등 강의 내내 날 선 발언들을 이어갔다. 한 교수는 별다른 설명 없이 긴 시간 피아노를 연주다가 피아노의 품질을 불평했고 격한 감정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홈페이지를 통해 항의한 독자 양모 씨는 “그날 강연회장에서의 일은 거의 폭력 수준이었다”며 “저자가 명성이 있다거나 외국의 철학자라거나 하는 것은 그의 언행에 어떠한 면책 사유도 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날 한 교수의 행동에 대해 옹호 여론도 있다. ‘웃흠’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남긴 한 독자는 “그분의 글을 읽고 이해를 하거나, 적어도 간단한 요약 글이라도 숙지를 하고 오셨더라면 그분의 행동과 말이 이해는 갔을 것”이라며 “아무 생각 없이 사진을 막 찍어댔던 사람, 강연자가 뭔가 행위를 하고 있음에도 불쑥 일어나 항의하듯 질문을 쏟아내 흐름을 방해했던 사람들도 저는 무례했다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한 교수의 신간에 그나마 한 교수가 이 같은 행동을 한 이유를 추측해 볼만한 구절들이 있다. 한 교수는 신간 ‘타자의 추방’을 통해 오늘날의 세계가 겉으로는 자유와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것이 지배하는 지옥’일 뿐이라며, 모든 것을 획일화하고 대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세계적인 것의 폭력이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 교수에게 있어 ‘타자’는 인간의 삶에 일정한 형상과 방향과 의미를 부여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존재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타자가 사라졌다는 게 한 교수의 진단이다. 한 교수가 지적한 현대사회의 모습은 ‘낯선 타자와 맞닥뜨릴 기회가 줄어들고 비슷한 것들만 창궐하는 사회, 오직 자신에게 익숙하게 길들여진 것만 상대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된 오늘의 나르시시즘적 사회’다.
김현주 문학과지성사 편집장은 “강의를 마치고 파악한 결과 (한병철 교수는) 오히려 독자들이 무례해서 정당하게 화를 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책을 보면 타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것을 상당히 강조하고 있는데 독자들이라면 말을 가로지르는 것이 무례한 행위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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