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는 과연 양극화·불평등·불공정·저성장·저출산이라는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진정성을 가지고 행동해왔는가. (중략) 영국의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는 ‘변화의 수단이 없는 국가는 그 보존수단도 없다’고 했다. 보수(保守)가 살아남으려면 보수(補修)해야 한다.”(유승민 저서,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 중에서)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는 매우 독특한 정치지형 위에 서 있는 인물이다. 구(舊)여권 출신의 보수 정치인이지만 텃밭인 대구경북(TK)에서는 ‘주군의 등 뒤에 칼을 꽂은 배신자’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야권 주자들과 비교해도 절대 밀리지 않을 만큼 진보적인 경제 공약을 내걸었지만 정작 중도·좌파 유권자들은 유 후보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별반 관심이 없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지율 꼴찌를 면치 못한다. 일각에서 유 후보를 가리켜 ‘슬픈 보수 수리공’이라는 평가를 내놓는 이유다.
이런 구도에 조심스러운 변화의 기운이 감돈다. 지난 13일 열린 첫 TV 토론회에서 풍부한 콘텐츠와 일관된 개혁보수 이미지로 다른 주자들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TV토론 이후 인터넷 실시간 1위를 기록했다. 국민들이 유 후보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그는 이번 대선에서 ‘국민에게서 버림받은 보수의 기둥을 다시 세우겠다’는 오랜 꿈을 실현할 수 있을까. 유 후보의 잠재력과 한계를 들여다봤다.
◇정치 입문 때 품은 ‘보수혁신’의 꿈=유 후보는 17년 전 정치권에 처음 발을 들일 때부터 보수 재건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가슴에 품었다고 한다. 가진 자와 기득권 세력의 편을 드는 전통적인 보수의 틀을 혁파하지 않으면 새로운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고 믿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변함이 없다. 실제로 유 후보는 지난 2011년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전당대회 출마 선언문에서 “빈곤층·실업자·결식아동·장애인 등 어려운 분들의 행복을 위해 당이 존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대선 국면에서 유 후보가 내놓은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제재, 재벌 총수 사면복권 금지 등의 공약은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온 정책이 아니라 오랜 세월 단련된 소신의 결과물이다.
다른 정치인들이 표심을 의식해 쏟아내는 ‘인스턴트 정책’이 아니라 오랜 기간 숙성된 ‘된장 정책’이다.
유 후보가 첫 TV 토론회에서 유독 돋보인 것은 가려진 그의 실체와 진가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모든 정책과 공약이 ‘깨끗하고 따뜻한 보수’ ‘경제는 개혁, 안보는 보수’라는 프레임 안에서 움직이다 보니 논리가 정연하고 발언에 막힘이 없다. 이 때문에 유 후보는 전날에 이어 14일에도 하루 종일 포털의 실시간 검색 상위권에 랭크되는 등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능력만큼은 유권자들에게 확실히 각인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통보수 지지 회복 땐 우파의 새 희망 부상=이 같은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은 답답하기만 하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상당하다. 지지율이 좀처럼 뜨지 않는 것은 유 후보를 ‘4선 국회의원’으로 밀어준 TK 지역민들이 등을 돌리고 있어서다. 아직까지도 TK 주민들은 보수 진영의 지난해 총선 참패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의 시발점은 유 후보의 ‘자기 정치’에서 비롯됐다고 믿고 있다. 진보와 보수를 넘나드는 정책적 실험도 그의 포지셔닝을 애매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유 후보는 “새로운 보수를 세우는 일은 앞으로도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복잡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멀어져간 정통보수의 민심을 되돌리는 것이 앞으로 남은 정치 숙제다. 가출한 집토끼를 다시 붙잡는다면 우파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부상하면서 잠재력이 빛을 발할 수 있다. 유 후보가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와의 단일화를 거부하면서 완주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것도 보수 적자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고장 난 보수를 고치는 ‘슬픈 수리공’이다. 지금은 작은 난쟁이에 불과하지만 보수층이 그의 진심을 알아준다면 거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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