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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 21세기 사법의 답은 국민이다

김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대한민국 70년은 양적 성장의 역사였다. 절대 빈곤을 경험한 국민들은 힘을 모아 정부의 초고속 경제 개발에 동참했고 기업에는 보상과 면죄부가 주어졌다. 기업 친화적 입법이 이어졌고 재벌 봐주기 판결이 반복됐다. 그 과정에서 정작 국민은 행복하지 못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국내총생산은 29% 성장했지만 국민의 삶의 질은 12% 개선되는 데 그쳤다. 이제는 성장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킬 때가 됐다. 인간다운 삶과 약자 보호가 핵심이다.

사법 정책도 이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 우리 재판 절차는 오랫동안 강자를 위한 제도라는 오해를 받아왔다. 미국식 ‘디스커버리 제도(증거개시 제도)’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는 재판 시작 전 쌍방이 모든 증거를 내게 하고 증거 제출을 거부할 경우 반대 측 주장 사실을 법원이 진실로 인정할 수 있게 하는 제도로 재판 과정에서의 정의와 형평 실현을 목표로 한다. 가령 기업과 개인 간 소송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조직과 증거 자료를 갖춘 기업이 소송에서 유리하다. 이때 디스커버리 제도가 있다면 기업이 입증 자료를 숨기고 주지 않을 때 공개하도록 압박할 수 있다. 집단소송의 실질화를 위해서라도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은 필수적이다. 최근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재판 과정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편안한 사법 분위기 형성도 새 시대의 사법이 추구해야 할 것 중 하나다. 우리 재판에서는 법원이 국민을 법정으로 소환해 법관의 권위 아래 모든 증인을 신문하므로 엄격한 분위기에 겁먹고 하고 싶은 말도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미국에는 소송 제기와 동시에 일방의 신청이 있으면 가장 편안한 시간과 장소를 정해 변호사가 상대 변호사 입회하에 증인을 신문하고 진술을 녹취해 법원에 제출하는 ‘데포지션(증언녹취)’이라는 절차가 있다. 이를 통해 증인은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진술할 수 있고 이는 실체적 진실 파악에도 도움이 된다. 재판 과정에서 문서 교부와 송달을 법원이 아닌 당사자가 직접 수행하는 미국식 ‘당사자 송달 제도’도 같은 맥락에서 참고할 만하다. 법관 주도의 하향식 시스템에서 당사자가 중심이 된 상향식 시스템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입법 정책도 이러한 사법 민주화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는 약자 보호와 실질적 정의 구현이라는 새 시대의 패러다임에 부합하는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이 같은 제도들이 현실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무엇보다 사법부의 노력이 절실하다. 그동안 법원도 사법 개혁을 위한 여러 방안을 추진해왔지만 여전히 국민이 법의 문턱을 높게 느끼는 것은 개혁의 초점이 국민이 아닌 사법 편의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21세기 사법부가 진정 개혁을 원한다면 기억할 것은 오직 하나다. 바로 국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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