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손을 거치면 평범한 풍경마저 기묘해진다. 인간은 식물의 형체를 하고 시계는 녹아내린다. 석류에서 물고기가 튀어 오르고 물고기의 입속에서 호랑이가 뛰쳐나온다. 어린시절부터 신경증 증세가 있었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1904~1989)는 낯선 것을 조합하며 그의 무의식 속 욕망을 화폭에 담았다.
그리고 달리가 태어난 지 꼭 60년 되는 해 스위스 사진가 집안에서 태어난 한 남자. 어린시절 체조를 배우며 서커스 세계에 발을 들인 다니엘 핀지 파스카(사진)는 하늘을 날고 싶던 꿈,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 싶던 어린시절의 금지된 욕망을 무대에 담는 서커스 연출자다. 그의 무대는 단순한 서커스가 아니다. 환상 속에나 가능할법한 의상과 몸짓, 조명과 무대미술이 어우러지는 초현실주의 무대 예술을 표방한다.
파스카와 달리. 이 보다 환상적인 조합이 있을까. 70여년간 종적을 감췄다가 2009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창고에서 발견된 달리의 그림 ‘광란의 트리스탄’은 이 둘의 만남을 주선했고 이렇게 탄생한 아트 서커스 ‘라 베리타’가 초연 4년만에 오는 27~30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를 시작으로 다음달 대전, 대구 등에서 내한 공연한다.
공연을 앞두고 방한한 파스카 연출은 25일 LG아트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서커스를 “삶의 시작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어린 아기들이 빈 공간 속 몸의 움직임을 체험하듯 온갖 금지됐던 충동과 욕구가 서커스의 세계에선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비현실의 세계를 그리는듯하지만 파스카의 서커스는 정확하게 현실의 삶을 비춘다. 파스카는 “저글링을 하는 배우, 줄타기를 하는 배우, 그네를 받쳐주는 배우 등 모든 배우가 자신이 맡은 역할 속에서 삶을 표현한다”며 “서커스를 포함한 모든 예술은 관객에게 삶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고 소개했다.
2012년 신작을 준비하던 중 만나게 된 ‘광란의 트리스탄’을 모티브로 서커스 작품을 만들면서 그가 가장 먼저 공부한 것 역시 이 작품을 그리던 당시 달리의 삶이었다. ‘광란의 트리스탄’은 1944년 당대 최고의 안무가 네오니드 마신의 발레 작품 ‘광란의 트리스탄’의 배경막으로 사용됐다. 높이 9m, 너비 15m에 이르는 이 대형 작품은 공연 후 분실됐다가 2009년 발견돼 경매에 부쳐졌고 제품을 구입한 익명의 수집가는 파스카에게 이 그림을 작품에 사용해 달라고 제안(투어공연에서는 작품 보호를 위해 사본을 활용)했다. 파스카는 “작품을 구상하면서 가장 먼저 달리가 살았던 스페인 카다케스로 가서 그가 살던 집, 읽던 책을 살펴보고 그의 삶에 이것들이 어떤 영감을 줬는지 상상했다”며 “달리의 그림들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적 측면으로 보면 자신의 내면을 악몽과 연결해서 표현하는데 이를 좀 더 친근하게 풀기 위해 샤갈의 회화적 요소를 차용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완성된 무대에서는 코뿔소 탈을 쓴 배우들이 붉은 실타래를 하늘 높이 던져 주고받고, 수채화 같은 조명 아래 반라의 무용수들이 밧줄을 타고 날아오른다. 달리의 꿈이 무대 위에 펼쳐진 셈이다.
파스카는 국내에선 ‘네비아’ ‘레인’ 등 아트 서커스 작품을 선보였지만 서커스에만 머물지 않고 영국국립오페라단,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 등 세계적인 단체·극장과 협력하며 발레,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이력은 토리노 동계 올림픽 폐막식(2006)과 소치 동계 올림픽 개·폐막식(2014) 연출이다. 당시에도 스위스 국적의 연출자를 기용한 데 대해 관심이 집중됐다.
내년 평창올림픽에 대해 파스카는 “제한된 시간과 예산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작품의 목적과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기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선 인간이 가진 힘을 시적으로 표현하길 원했고 러시아에선 기술의 힘에 중점을 두고 후대에 남을 기념물을 요구했다”며 “시간과 예산을 잘 분배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기획을 철저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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