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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회의 빛과 그림자





1976년 5월 31일 오후 6시~9시. 전국 671만 가구, 25만 개 반(班)에서 반상회(班常會)가 한꺼번에 열렸다. 반상회는 이전부터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동시에 열린 것은 처음. 기본 의제는 새마을운동 확산과 장발 단속 기준 전파, 새로운 주민등록증 휴대 등 8개. 내무부가 지침을 마련해 전국 통반장에게 뿌렸다. 지역별로 원호 가족 돕기, 불법 무기 자진 신고, 하절기 재해 예방, 위해 식품에 대한 계몽 등도 의제로 다뤄졌다. 전국 동시 반상회는 법적 근거도 없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명을 받은 내무부가 일방적으로 정했다.

새마을의 날(매월 1일)을 앞두고 치러진 사상 최초의 전국 규모 반상회는 성황 속에 끝났다. 출석률 78.5%. 절반을 겨우 웃도는 수준이던 이전보다 국민들의 참여도가 훨씬 높았다. 내무부가 일선 행정·경찰 조직을 다그친 결과다. 동사무소와 파출소는 관내를 가가호호 방문해 참석을 다짐 받았다. ‘100% 출석’ 목표를 부여받은 통·반장 중의 일부는 불참자에게 벌금까지 매겼다. 여성과 노인이 대부분이었어도 각 가정에서 한 명씩은 반상회에 나갔다. 성공에 고무된 김치열 당시 내무부 장관은 “반상회는 이스라엘과 스위스에서도 실시되는 민주자치회의로 이조 시대에도 있었다“라고 성과를 추켜세웠다.

김 장관의 말은 반 만 사실이었다. 한국의 반상회는 정권 홍보, 주민 통제 강화가 목적으로 이스라엘이나 스위스의 직접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조선 시대에도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다섯 가구를 하나로 간주해 군역이나 세금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도망자 또는 죄인을 숨겨줄 때 공동 책임을 지는 ‘오가작통(五家作統)’이 있었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도 비슷한 조직을 만들었다.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산하의 각 지방연맹 밑에 10가구를 한 단위로 묶어 ‘애국반(愛國班)’이라고 불렀다.

일본에서도 ‘도나리구미(隣組)’라는 애국반이 생겼지만 시작은 조선이 먼저였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에 따라 조선을 병참기지로 활용할 생각이던 일제는 ‘조선인의 자율적인 협력’과 ‘통제 강화’에 나섰고, 애국반은 그 산물이었다. 애국반은 전방위적인 활동을 펼쳤다. 사상 통제에서 내핍 강요, 배급 통제, 전투병(지원병) 모집에 이르기까지 말단 행정을 맡았다. 막상 조선인의 호응은 높지 않았다. 일제와 일본 국왕에 대한 충성 강요와 인력 동원은 반감을 샀다.

일제는 배급을 통해 조선인의 목줄을 눌렀다. 애국반에 참석해야 배급표를 주고 배급표가 있어야 식량을 살 수 있었다. 일제는 애국반에 가입하고 참석하지 않으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저술가 김환표의 ‘사회문화사 탐구-반상회의 역사’(월간 인물과 사상 2011년 4월호)에 따르면 1942년 현재 애국반 수는 37만 개. 애국반원은 450여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조선의 세대수가 492만 세대였으니 사실상 모든 세대가 애국반에 가입된 셈이었다.

해방과 함께 사라졌던 애국반은 강력한 1인 집권 체제를 꾀했던 이승만 정권에 의해 1948년 ‘국민반’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났다. 국민반의 목적은 민중 감시와 통제. 반장을 경찰이 임명하고 반상회도 경찰 입회 하에 열렸다. 국민반의 위력은 선거에서 나타났다. 국민반 조직을 통해 여당 후보의 선전물을 집집마다 돌렸다. 국민반원을 3인조 또는 5인조로 묶어 집단 투표하는 부정까지 저질렀다. 1960년 3.15 선거를 앞두고는 반상회가 월 1회라는 원칙을 깨고 시도 때도 없이 열려 여당 후보의 선거전을 도왔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며 사라졌던 반상회는 5.16 쿠데타와 함께 되살아났다. 국민반도 1961년 7월 ‘재건반’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하고 반상회도 매월마다 열렸다. 반상회의 역할은 똑같았다. 야당의 선거 유세라도 있으면 대낮에 반상회가 소집돼 막걸리 파티가 펼쳐졌다.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위한 6차 개헌(1969)을 앞두고 반상회는 더욱 정치적으로 변해갔다. 박정희 정권은 반상회를 매월 두 차례 이상 열어 정권 홍보에 나섰다. 동장과 반장에게는 소액이나마 연말 상여금까지 내줬다. 선거철이면 부녀자들이 반상회에서 막걸리를 먹고 취해 고성방가로 소란을 피워 신문 사회면에 올랐다.



박정희 정권은 이런 비판에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반상회의 통제 기능을 강화하려 애썼다. 공무원 조직을 활용해 출석률을 점검하고 주민들의 성분을 분석하고 요주의 인물들을 감시했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1976년 처음 열린 전국 동시 개최 반상회의 목표도 ‘국민 총화’에 있었다. 북한의 8.18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직후에 예정일보다 6일 앞당겨 열린 반상회에서는 187명이 혈서를 쓰며 북괴의 만행을 규탄하고 149개 반에서 김일성 화형식을 가졌다. 그러나 출석률은 갈수록 떨어졌다. 반감을 갖는 주민이 많아진 탓이다. 1979년 10.26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면서 반상회도 힘을 잃었다.

생명을 잃어가던 반상회는 전두환 정권의 등장으로 다시 힘을 얻었다. 불과 8개월 사이에 육군 소장에서 대통령으로 옷을 갈아입은 전두환의 통치권자로서 첫 행보가 연희동 반상회 참석이었다. TV를 틀면 어디서나 이를 보도했다. 공중파 TV 2개사의 3개 채널은 한결같이 ‘새 시대를 향한 온 국민의 전진’이라는 이름 아래 전두환 찬양 특집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5공 치하의 반상회는 일제 강점기부터 내려온 부작용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였으며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 후보의 선거 도구로 악용됐다.

5공 시절 반상회에서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현상이 하나 나타났다. 아파트가 많아지고 너나 없이 투기에 나서면서 ‘복덕방 반상회’가 등장한 것이다. 주민들이 반상회에서 아파트 가격을 담합하는 풍토가 이때부터 고개 들었다. 평소에는 반상회에 무관심한 가구도 아파트 매매 가격을 논의하는 반상회에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집을 싸게 팔지 말자’는데 뜻을 모은 주민들은 서로 ‘실천 각서’를 썼다. 반장들이 돌면서 각서를 받고 전세 들어 있는 집은 원주인에게 우편으로 통고해 각서를 받았다.

시대가 변해도 정부는 정권 홍보수단으로써 반상회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1989년 8월 열린 반상회 곳곳에서는 문교부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이론 투쟁이 펼쳐졌다. ‘교원 노조가 주장하는 참교육은 위장된 민중 교육’이라는 유인물 200만장을 배포한 문교부에 맞서 전교조 소속 교사들은 반상회에 적극 참석해 전교조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정부가 반상회를 홍보수단으로 활용하면 할수록 참석률은 더 떨어졌다. 1980년대 후반에는 40%대를 밑돌았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은 반상회 폐지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

‘문민정부’라는 구호를 내걸었던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1993년 반상회의 성격을 정부 홍보와 관 주도에서 민간 자율로 변화시켰다. 1995년에는 지방자치단체의 판단에 따라 반상회 존속을 결정하도록 했다. 이후 정치 통제의 수단으로 반상회의 생명은 사실상 꺼졌다. 대도시에서는 주로 아파트 가격 올리기 정도에 활용될 뿐이다. 지역별로 특색 있는 반상회를 유지하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반상회의 역사-국민 동원과 통제의 수단에서 이익집단화까지’(월간 인물과 사상, 2011년 4,5,6월호)를 쓴 김환표 작가에 따르면 그나마 남아 있는 반상회의 이익집단화 현상은 공적 영역에 대한 불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반상회를 악용했던 정치에 대한 불신이 지역사회의 자율 기능을 무너뜨리고 경제적 이익에만 몰두하는 현상을 낳았다는 얘기로 들린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반상회를 정권 또는 정부 시책의 홍보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는 최근까지 있었다. 이명박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을 유발한다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전국 반상회를 활용하려다 역풍을 맞았다. 지난 2015년 말 박근혜 정부는 반상회를 열어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당위성을 전파하려다 전국적인 반발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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