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계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 양국의 정권교체 이후 첫 번째 한미 정상회담이 열흘밖에 남지 않은 가운데 한미 관계에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다. 현재까지 표출된 갈등만으로도 한미 관계가 위험수위에 다다랐다고 봐야 한다는 게 외교가의 평가다.
미국 정부와 의회, 대북 전문가들은 문재인 정부가 북한과의 대화에 적극 나서려 하면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에는 회의적 태도를 보인다는 의구심을 떨치지 않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도 북한과의 대화 가능성을 열어놓기는 했지만 북측이 잇따라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며 도발을 멈추지 않는 상황에서 최근 문재인 정부가 남북 대화 재개에 초점을 맞추는 데 대해서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지난 14일(이하 현지시간) 하원 외교위원회에서 “중국에 북한을 돕는 10개 중국 기관들의 리스트를 전달하고 조치를 촉구했다”고 밝혔다. 그는 21일 워싱턴에서 열릴 ‘미중 외교안보 대화’에서도 중국에 북측을 지원하는 자국 기업과 개인을 제재하도록 요구하며 대북 압박에 집중할 예정이다.
트럼프 정부가 대북 압박을 강화하는 것은 계획된 측면도 있지만 13일 북한에 17개월간 억류됐다 혼수상태로 귀국한 대학생 오토 웜비어 사건 이후 미국 내 여론이 북측에 더욱 적대적이 된 특수성도 감안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때문에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가 16일 “북한이 핵·미사일 활동을 중단하면 미국의 한반도 전략자산과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축소할 수 있다”고 발언한 데 대해 미국은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국 새 정부의 고위인사가 미국과 충분한 조율 없이 앞서 나갔다는 것이다. 뉴욕의 한 외교소식통은 “웜비어가 코마 상태로 돌아와 미 정부와 국민이 격앙된 상태인데 미국 측의 전략자산을 북측과의 대화 지렛대로 언급해 우려가 제기됐다”고 말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사드 배치가 지연되는 것을 놓고 강한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진 상황에서 문 특보가 “사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한미동맹이 깨진다면 그게 무슨 동맹이냐”고 직격탄을 날려 미국 측 외교 라인이 상당히 당혹스럽고 난처한 입장에 처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8일 틸러슨 국무장관,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과 한반도 안보 현안을 논의하다 사드 배치 지연 대해 보고받고는 “(그럴 거면) 차라리 사드를 빼라”며 크게 화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미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의 브루스 클링너 선임연구원은 문 특보의 발언에 대해 “북한에는 일방적인 대화 정책으로 나가면서 사드 배치에는 심한 저항을 나타낸 것으로 비쳤다”며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의 우려를 누그러뜨리기보다는 오히려 고조시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청와대는 19일(한국시간) 문 특보 발언의 파장이 확산되자 긴급 진화에 나섰다. 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날 “문 특보에게 앞으로의 한미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엄중하게 말씀드렸다”고 말했다. 이는 문 특보에게 돌출발언을 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했다는 말로 해석된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회담 분위기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한 조치다.
미국은 특히 한미 합동군사훈련 축소 발언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외교가는 전했다. 합동훈련 중단은 북한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내용이며 중국이 미국에 제안한 ‘쌍중단(雙中斷·북한은 핵과 미사일 도발을, 한미는 합동군사훈련을 동시에 중단)’과도 같은 방향이지만 한미는 지금까지 이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으로 보고 검토조차 하지 않았다. 특히 미국의 입장에서는 북한뿐 아니라 중국을 견제·압박하는 의미에서도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중단 또는 축소할 생각이 전혀 없어 문 특보의 발언이 미국 외교 당국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뉴욕=손철특파원 박형윤기자 runiron@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