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어찌 그리 조리 있게 잘하느냐’는 칭찬을 듣던 어린이는 자신의 장점을 살려 법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굉장한 시험을 치러야 자격을 갖출 수 있음을 알았기에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헌법 전문을 외우기로 했다. 하지만 어린이는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 그런 노력이 시험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알아채고 말았다. 매시 정각에는 공영방송, 30분에는 교인이 아니면서도 뉴스를 찾아 기독교방송에 채널을 맞춘 아버지의 트랜지스터라디오 덕분이었다. ‘헌법 개정’의 의미를 이해한 그날 이후 어린이의 장래희망은 정치인으로 바뀌었고 성장하며 내부에서 솟아나는 예술적 재능을 알아채자 어린이의 장래희망은 또다시 바뀌었다.
여러 희망의 단계를 넘어서 연구자가 됐을 때, 국회의사당을 배경으로 한 사진들은 그에게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 단 하나의 단서에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이승만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초대 국회의장의 지위로 헌법을 공포하던 모습과 초대 대통령에 오르며 선서를 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그것이다. 이 사진들은 지금은 사라진 남산의 이승만 대통령 동상을 찍은 사진과 달랐다. 남산의 이승만 동상을 만든 윤효중 조각가는 고름을 날리는 두루마기를 입은 동상이 대통령선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라고 했다. 헌데 사진 자료 속에서 대통령선서를 하는 ‘이승만 박사’는 양복을, 헌법을 공포하는 ‘이승만 의장’은 고름이 아닌 단추가 달린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양복이나 단추 달린 두루마기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름이 달린 두루마기를 착용한 모습으로 동상을 제작한 것은 대중에게 친근한 전통의 이미지를 채용한 결과였다.
중앙청이 된 ‘헌법을 공포하는 사진 속 국회의사당’ 대신 샛강의 악취와 모래바람을 뚫고 여의도에 새로이 국회의사당을 짓던 지난 1974년 4월, 국회는 새로운 의사당 앞에 무궁화를 든 애국애족상과 태극기를 든 약진상, 그리고 선과 악을 가리는 해태상을 세우기로 했다. 해태상은 광화문 앞에 있는 것보다 1.5배 큰 것으로 이순석 서울대 교수가 조각했고 해태제과가 기증했다. 해태상 아래에는 100년 뒤에 꺼내는 조건으로 백포도주를 넣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해태제과 측에서는 화기를 막기 위해 제작한 해태상 아래에 역시 화기를 먹는 백포도주 20여병을 넣은 것일 뿐이라고 항변했다. 1978년에는 국회 개원 30주년을 기념해 국회 앞 광장 중앙에 분수를 세웠다. 애국애족상과 약진상을 제작했던 김세중 교수가 대한항공의 희사로 제작한 것이었다.
국회의사당의 상징이 된 조형물의 탄생에 얽힌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은 오는 2018년 개원 70주년이 되는 국회의사당 앞에 세워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이미 누군가는 동상이나 기념비를 준비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세워야 할 것이 유형의 그것만은 아님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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