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한 지역축제에서 황소의 무게를 알아맞히는 시합이 열렸다. 8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내기에 참가했는데 놀랍게도 이들이 내놓은 숫자의 평균이 실제 황소 무게에 가까웠다. 여기까지가 ‘대중의 지혜’라는 책에 소개된 내용이다. 그러나 이 우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황소의 실제 무게를 재는 저울의 정확도가 떨어지자 사람들은 비용을 들여 수리하는 대신 대중의 지혜로 황소의 무게를 알아맞히자고 제안한다. 이후 유리한 정보를 얻어 황소 무게를 맞히려는 무리가 생겨났고 이를 규제하는 규칙들도 생겼다. 분기마다 황소 관련 정보를 담은 회보를 발행하고 사적으로 교환한 정보도 공표하도록 했다.
일부 사람들은 잔꾀를 썼다. 실제 무게를 달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이 추측하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 황소의 실제 무게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황소의 실제 무게 대신 다른 구경꾼들의 추측을 예측하는 전문가들이 생겨났고 급기야 황소 무게 평가 규칙을 정의하는 국제기구가 만들어지더니 황소의 무게는 ‘모든 사람이 추측한 값의 평균’이라고 정의했다. 이쯤 되자 추측 전문가, 시합 주최자, 자문역 등으로 이뤄진 거대한 산업이 생겨났고 그 누구도 저울을 수리하는 게 돈이 더 적게 든다고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본 배분·자금관리 등 금융업 본래 역할 잊고
신용평가기관과 야합, 증권 트레이딩 ‘딴짓’
타인의 돈으로 높은 수익·급여에만 몰두
런던비즈니스스쿨·런던정경대 석좌교수 존 케이가 저서 ‘금융의 딴짓’에서 소개한 이 우화는 실물경제와 괴리된 채 비대해지기만 한 오늘날 금융의 현실을 비추고 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감독과 규제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이때 가장 많이 거론된 것이 은행에 대한 건전성과 유동성 규제를 강화하고 과도한 보상체계를 뜯어고치자는 것이었다. 개별 국가단위를 넘어 규제강화를 통한 해법 찾기에 머리를 맞댔고 일제히 복잡하고 세세한 규제안들을 쏟아냈다. 마치 은행이 하는 모든 일을 감시하겠다는 선전포고와 같았다. 마치 우화 속 금융 시스템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는 모양새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금융위기의 위험에서 안전할까. 저자는 더 큰 위기가 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정부가 구조와 동기의 문제를 개선하는 대신 기존 관행에 대한 감독과 통제를 강화하는 데만 집중하면서 이른바 ‘타인의 돈’으로 금융업이 딴짓을 하고 높은 수익과 급여를 가져가도록 내버려뒀기 때문이다.
‘딴짓’이라는 말이 성립하려면 본래의 역할이 무엇인지 짚어보는 것이 우선이다. 약 500여 페이지 분량에 걸쳐 저자가 주장하는 금융 본연의 기능은 ①결제수단 제공 ②자본 배분(차입자와 대출기관 연결) ③자금관리 ④위험관리다. 금융의 성공, 혁신 모두 이런 목표를 얼마나 잘 달성하느냐로 평가돼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정작 자금이 필요한 중소기업이나 소외계층은 금융의 단비를 맞기 어렵고 잊을만하면 한 번씩 부실한 금융상품 판매의 폐해로 원금을 잃은 투자자들이 거리로 나앉지만 단기적인 구제 방안만 논할 뿐 본질에서 벗어난 금융업을 바로잡기 위한 논의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특히 일자리, 소득, 세수 등의 지표로 금융산업의 경제적 의미를 논하다 보니 금융업이 다루는 상품구조는 복잡해지고 규모는 비대해지며 본연의 공적 기능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된 지적이다.
그렇다면 은행들은 ‘타인의 돈’으로 어떤 ‘딴짓’을 하고 있을까. 영국 은행의 자산은 대략 7조 파운드(약 1경184조 원)인데 사람들이 주로 은행의 주요 업무로 꼽는 기업과 개인간 대출은 3%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타 금융기관에 대출하고 있다. 이는 은행들이 유휴자본의 가용성을 높인다는 금융 본연의 본질에서 벗어나 증권화와 증권 트레이딩, 이른바 돈놀이를 통해 성장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실제로 대출채권은 물론 영화 수익, 유럽 축구팀의 수익마저 증권화됐고 이 증권의 신용도를 평가하는 신용평가기관은 은행에 야합했다. 대부분의 투자자와 트레이더는 증권에 찍힌 신용평가등급만 보고 거침없이 돈을 밀어 넣었고 그 결과 세계 금융시장이 붕괴 위기에 몰렸다. 이후 모럴 해저드에 빠진 금융에 대한 단죄가 이어졌지만 조연급만 쇠고랑을 찬 이른바 꼬리자르기에 불과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방대한 분량의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금융의 구조와 금융계의 동기유인을 바꿔야 한다는 것, 나아가 대중과 사회지도층이 금융 개혁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의 주장은 규제 강화와 거리가 멀다. 오히려 방향성은 잘못된 채 과도한 규제가 시장을 왜곡하고 있으며 금융인 개개인이 가져야 할 윤리기준을 약화한다고 주장하다.
본질 벗어난 금융 바로잡기 시급
대중·사회지도층 개혁 주도해야
이 책은 수치보다는 사례 중심으로 금융의 문제를 논한다. 금융 개혁에 목소리를 낼 대중들을 학습시키기 위한 대중서를 지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대중서라기엔 금융의 역사부터 정책까지 다루는 내용이 방대하고 전문서라기에는 근거가 다소 빈약하다. 자본과 생산의 선순환 사이클을 만드는 금융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자는 주장은 동의하지만 ‘타인의 돈을 관리하는데 요구되는 성실함과 신중함을 내면화해야 한다’느니 ‘금융은 가계와 금융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느니 하는 대목에선 도덕책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금융위기의 진원이 남아있으며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책은 제 역할을 한다.
앞서 소개한 우화의 결말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황소는 죽었다. 황소에 밥을 줘야 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잊은 탓이다. 2만3,000원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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