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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9.11…미국,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다





9월 11일 아침. 수도 한복판에서 테러가 일어났다. 범인은 특정종교의 과격 분자가 아니라 칠레 군부. 선거로 뽑힌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피노체트 육군참모총장이 이끄는 군대가 1973년 초가을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아침부터 공영 라디오 방송은 ‘산티에고에 비가 내립니다’라는 안내 방송을 반복해서 내보냈다. 좀처럼 비를 구경할 수 없다는 ‘산티에고에 내리는 비’는 쿠데타군의 작전 개시 신호였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쿠데타군은 공군 전투기까지 동원해 대통령궁에 폭탄을 투하했다.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당시 65세)은 쿠데타 보고를 받고 주요 지휘관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누구도 받지 않았다. 모두가 쿠데타에 참가한 것이다. 얼마 뒤 쿠테다 세력으로부터 제의가 들어왔다. ‘신변 안전을 보장할 테니 외국으로 망명하시라’는 제안을 아옌데 대통령은 단호하게 물리쳤다. 오전 9시 10분, 대통령은 마이크를 잡았다. 아옌데의 최후 연설은 라디오 전파를 타고 칠레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 방송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마지막일 겁니다. 곧 이 방송국도 침묵할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나는 민중의 지지와 성원에 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저들은 무력으로 우리를 노예로 만들 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와 사회의 진전은 범죄로도 무력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고 민중에 의해 건설됩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중략) 나는 우리나라의 운명을 믿습니다. 언젠가 또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시민들은 위대한 길을 걸어 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하게 될 것입니다. 이 것이 저의 마지막 말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마지막 연설을 마친 아옌데 대통령은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보좌관과 비서, 경호대 모두 대통령궁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자신은 소총을 들고 항전하다 대통령궁이 공습 당하는 전투 와중에 숨졌다. 선거로 뽑힌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도 끝났다. 사인에 대해 온갖 추측과 모순이 무성했으나 4반세기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권총 자살로 밝혀졌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자신을 수도방위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이라는 중책을 잇따라 맡기고 대장으로 승진시킨 아옌데에게 반기를 들었을까. 피토체트 주변 인사들이 하나같이 아옌데가 잘못되기 바랬다. 미국은 처음부터 아옌데 정권이 싫었다. 중남미에 민족주의나 좌파 정권이 하나 둘 들어서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기밀이 해제된 미 국무부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아옌데의 취임 자체를 막으려고 애썼다. 아옌데가 미국 자본이 장악한 구리 광산을 국유화한 뒤에는 더욱 미운 털이 박혔다. 미국은 쿠데타 직전에 중앙정보국(CIA)을 통해 피노체트 쪽에 자금 1,000만 달러를 내줬다.

칠레의 대농장주들과 자산가들 역시 아옌데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경우가 많았다. 군부도 비토세력의 하나였다. 취임 이래 쿠데타 설이 끊임없이 돌았다. 결정적으로 아옌데의 힘을 약화시킨 것은 중산층과 고임금 노동자들의 반(反) 아옌데 진영 가담. 중산층은 세금이 더 올라갈 것이라는 계산에서 아옌데 퇴진을 누구보다 반겼다. 칠레의 간판 산업인 구리 광산에서 일하던 광부들은 ‘미국계 회사 노동자’ 신분에서 공기업 직원으로 바뀌면 급여가 줄어들까 우려해 연일 반대 데모를 벌였다.



정치 여건은 더욱 복잡했다. 두 야당 가운데 하나는 아옌데가 제출한 법안은 무조건 돌려보냈다. 야당 한쪽은 아옌데가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원하고 다른 하나는 아옌데 정부 흠집 내기에만 골몰했다. 아옌데 대통령이 임명한 각료도 툭 하면 해임되기 일쑤였다. 아옌대는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야당’ 과 대연정을 제안했으나 야당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연정이 실패하자 아옌데는 국민들에게 직접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할 생각이었다. 9.11은 국민투표 방안을 공개할 방침이었으나 쿠데타군의 선수 치기에 막혔다.

아옌데는 운도 없었다. 마침 경제 요건이 좋지 않았다. 취임 첫해에 반짝 성장을 기록했으나 이후부터 성적이 좋지 않았다. 쿠데타군도 ‘경제 파탄’을 거사 명분으로 삼았다. 가파른 물가 상승세(1970년 34.9% → 1974년 508.1%)에, 성장률은 2년 연속 마이너스에 머물렀다. 경제가 나빠진 근원적인 이유는 미국에 있었다. 미국은 구리 재고를 있는 대로 풀어 칠레의 주수출품인 구리 국제가격을 떨어뜨렸다. 네슬레 같은 식품회사에 압력을 넣어 분유 수출까지 막았다.

미국의 지원으로 성공한 쿠데타 직후 칠레에는 잔혹한 피바람이 불었다. 가수 빅토로 하라는 쿠데타 이틀 후 체포돼 고문 끝에 숨졌다. 군인들은 하라의 숨이 끊어졌는데도 총질를 가해 몸에서 무려 44 발의 총탄이 발견됐다. 검거 선풍이 시작된 이래 시민 3,197명이 학살되고 1,197명이 실종됐으며 13만 명이 감옥에 갇혔다. 절반은 아직도 고문 후유증을 앓고 있다. 하라의 유족들은 사건 발생 40여년이 지나서야 겨우 원인을 규명해 책임자들 처벌해달라는 소송을 착수할 수 있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는 관료들을 물갈이하면서 시카고대학 경제학과 출신들을 대거 받아들였다. 규제완화와 정부개입 최소화를 주장하던 밀턴 프리드먼의 제자들인 이들 ‘시카고 보이스’는 칠레를 세계 최초의 신자유주의 실험장으로 만들었다. 칠레의 신자유주의는 과연 성공했을까. 평가가 극과 극이다. 외환위기를 겪자 1982년 피노체트는 시카고 보이스들을 퇴출시키고 동아시아식 통제경제를 접목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피노체트는 아옌데가 남긴 경제적 유산 덕분에 재정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아옌데가 국유화한 구리산업은 ‘칠레의 월급 봉투’로 불리며 수출의 절반가량을 채우고 있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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