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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씨책방 "책방에 깃든 추억·情 두고 떠나야 한다니 두려워요"

45년 역사 '공씨책방' 퇴거 위기

장화민 사장 '임차인 설움' 토해

새 건물주, 월세 230%나 올리고

법원 계약갱신청구권 불인정에

20년간 머문 신촌 떠나야 할 판

세월이 만든 가치 순식간 무너져

한자리 지킨 상인들 恨 많을 것

장화민 공씨책방 사장이 28일 서울 서대문구 공씨책방에서 판결문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신다은 기자




45년 된 1세대 헌책방 ‘공씨책방’이 서울 서대문구 신촌로에 들어서 있다./송은석기자


집행을 앞둔 헌책들은 말이 없다. 문 앞에 소복이 쌓여 다음 이사를 가만히 기다린다. 주인은 초조하다. 하도 만져 너덜너덜해진 판결문을 쥐고 책방 앞을 서성인다. “가집행 들어오면 책들 다 묶어서 밖에 내던질 텐데 어떡하죠. 45년 동안 이사를 네 차례나 겪었지만 이렇게 두렵긴 처음이예요.” 서울 서대문구 ‘공씨책방’ 사장 장화민(60)씨는 책들을 정리하다 말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공씨책방은 한때 이문재·정호승 시인 등을 단골로 둔 전국 최대 규모의 헌책방이었다. 1972년 고(故) 공진석씨가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에서 처음 시작한 후 3차례 이사를 거쳐 1995년 조카 장씨가 서대문구 신촌로에 새로 문을 열었다. 우리나라 1세대 헌책방답게 희귀하고 오래된 책을 10만권 넘게 보유하고 있어, 2014년엔 ‘서울 미래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 자부심 때문에 장씨는 내심 “스스로 장사를 접지 않는 이상 신촌에 평생 있을 것”이라 믿었다.

평화는 20년 만에 새 주인이 바뀌면서 깨졌다. 20년간 거래하던 건물주는 지난해 8월 계약해지를 통보하고 건물을 팔았고 11월에 들어온 새 건물주는 월세를 230% 올렸다. 집주인이 정신 없이 바뀌는 동안 계약이 만료돼 계약갱신청구권을 써 볼 도리도 없었다. 건물주는 책방을 상대로 “건물 1층을 양도하라”는 명도소송을 걸어 지난 21일 승소했다. 서울서부지법 민사5단독 황보승혁 판사는 공씨책방에 지연손해금 및 밀린 월세 800만원과 함께 건물 1층을 비우라는 판결을 내렸다.

책방 측은 재판에서 상가임대차보호법상 계약갱신청구가 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가임대차보호법 10조는 전체 임대차기간이 5년 이상 된 건물은 계약갱신을 청구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황보 판사는 “변칙적으로 2층의 계약시점인 2015년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계약 만료 전 책방이 먼저 갱신을 청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며 주장을 기각했다. 월세가 3회 밀린 점도 이유가 됐다.



이번 재판은 현행법이 5년 이하 임차인들에 한해, 계약기간 만료 전에만 유용하다는 법적 한계를 드러냈다. 공간사용의 역사적 가치를 매겨줄 법적 수단이 없기 때문에 임차인은 매장을 오래 쓸수록 법의 보호에서 벗어난다. 이 때문에 법률 대응을 촘촘하게 준비해야 하는데 생계에 치여 놓치는 임차인들이 많다. 한 공간을 오래 쓰며 가꿀 수록 권리가 줄어드는 현상. 수십 년 장사한 ‘동네 터줏대감’들이 당면한 역설이다.

“판사님은 저희 책방이 장소보단 책으로 유명해졌다고, 그러니까 다른 데서 새로 시작해도 된다고 했거든요. 근데 신촌 독수리다방이나 대학로 학림다방, 오래된 냉면집들이 어디 음식 맛 때문에만 유명했겠어요. 다들 거기 얽힌 추억이 있으니까 찾는 거죠. 책방을 찾던 거리가 달라졌는데 손님들의 추억이 그대로 살아날 수는 없을 거예요.”

책방이 나가는 자리엔 생과일주스 가게가 들어설 예정이다. 재산 증식을 위해 부러 대출을 받아 건물을 샀다는 새 집주인은 장씨에게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 300만원을 내지 못하면 비워줘야 한다고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건물주가 건물을 쓰겠다는데 무조건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며 “차라리 임대인·임차인 간 분쟁을 조정해 줄 기구를 마련하는 편이 현실적인 대안일 것”이라고 말했다.

장씨는 항소를 고려하고 있지만 앞길은 안갯속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공씨책방의 임대계약 기간은 지난해 10월 5일로 완전히 종료됐다. 승소의 가능성은 불투명하고 지연손해금은 이미 140만원씩 매달 빠져나가게 됐다. 장씨는 반쯤 구겨진 판결문 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헌책을 팔았든 떡볶이를 팔았든, 95년부터 쭉 뭔가를 해 온 상인들은 다 같은 마음일 거예요. 오랜 세월 만들어 온 가치들이 이렇게 순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나 하는 허망함요. 가슴에 한이 많이 남아요.”

/글·사진=신다은기자 down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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