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학로에서 만난 손병호는 “지역 보스에서 전국구 보스까지 주로 악역을 맡아왔다. 하지만 이번에 맡은 역은 악역이 아닌 멋진 보스이다. 누군가를 퍼 담을 수 있어야 하는 인물로, 올바른 길을 잡아주고, 천천히 바라봐 준다. 그런 면에서 해롤드는 신적인 존재이자 수호천사 같다.”고 말했다.
연극 ‘오펀스’(원제-Orphans, 연출 김태형)는 미국의 극작가 라일 케슬러의 대표작으로,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온 고아형제 형 ‘트릿’과 그의 동생 ‘필립’이 어느 날 나타난 50대 중년의 시카고 갱 ‘해롤드’ 를 만나 우연히 시작된 그들의 동거 이야기를 담은 작품. 작가는 가정과 사회로부터 소외 당하여 내면 깊이 아픔과 상처를 지닌 세 인물이, 서로의 외로움을 채워주며 점차 가족이 되어가는 모습을 매우 감각적으로 풀어낸다.
미국의 극작가 겸 배우 라일 케슬러(Lyle Kessler)가 쓴 이 작품은 1983년 미국 LA에서 초연됐다. 1987년엔 동명 영화로도 제작됐다. 2005년 연극으로 다시 무대에 올렸을 때에는 배우 알 파치노가 해롤드 역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손병호가 맡은 해롤드는 고아 형제들과 함께 살아가게 되는 미스테리한 50대 중년남자이자 부유한 갱스터이다. 배우 박지일과 같은 역할로 번갈아가며 무대에 선다. 깔끔한 슈트를 입고 인터뷰 현장에 들어선 그를 보고 “멋있으세요.”는 말을 건넸다. 곧 “역시 양복을 입어 줘야 해요”라며 유쾌하게 답을 보낸다. 그리고선 “누군가 말 한마디, 손짓 하나, 눈짓하나가 우리 모두에겐 필요하다”는 의미 있는 말을 꺼내놓았다.
“사실상 가족이 있지만 인생이 다 외롭지 않나. 돌아보면 늘 신이란 게 멀리 있다고 생각해 왔다. 신적으로 다가온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롤드는 다가간다. 그도 고아였기 때문에 외로움을 잘 안다. 내가 경험하고 알고 있기 때문에 고아인 트릿과 필립에게 의미 있는 손짓을 보낸다. 어찌보면 해롤드는 누군가의 인생 전체를 바꿔주는 인물이다. 그가 지닌 삶의 깊이, 철학,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신이 바로 해롤드다. 그 역할을 내가 맡아서 더 기분이 좋다. 하하하”
‘오펀스’의 주인공은 사실상 필립이지만 핵심 키는 해롤드가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해롤드가 주인공 아닌가”란 우문을 던졌다. 그러자 “세상에 주인공 아닌 사람이 어디있나. 다 삶의 주인공 아닌가”란 현답이 돌아왔다.
“작품 속에서 아픔이 더 드러난 인물은 트릿이다. 고독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두 형제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해롤드가 상징하는 게 많지만 주된 이야기는 두 형제의 상처와 고독이 어떻게 위로 받는지를 말하고 있다.”
손병호는 헤롤드 철학은 “외롭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엄마’라는 상징적인 존재가 아닌 ‘격려’이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작품 속에서 해롤드의 인생이 녹아있는 철학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고 귀띔했다.
“우린 다 엄마를 갖고 싶어해요. 엄마, 더 나아가 가족이란 존재는 필요하지만, ‘나 혼자 살아있어야 한다’는 게 먼저 서지 않으면 안 돼요. 삶은 내가 우뚝 서지 않으면 안 돼요. 그걸 깨닫게 해주는 인물이 해롤드죠. ‘너희도 필요한 게 엄마는 아니었을 거야. 단 너에게 격려가 필요했을거야.’ 이렇게 격려해 주려고 해롤드가 와요. 트릿에게 ‘잘 살았어. 니 나름대로 애쓰고 살았어’라고 말해줘요. 깨달음의 깊이가 남달라요. 단순히 세 인물의 갈등이나 서사 구조보다 깊이가 있다는 게 매력적이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재미와 깊이가 있어요. 관객들이 자신 마음 속의 해롤드를 찾아가는 시간이 됐으면 해요.”
손병호가 ‘오펀스’를 택한 결정적 이유는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은 죽는다는 걸 깨닫고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고 했다.
“왜 ‘오펀스’란 작품을 결정했느냐 물어본다면, 작품 속 중요한 대사로 이야기할 수 있어요. 해롤드의 철학은 인간이 죽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살아 있는 순간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간 고통의 한계라고 볼 게 아닌, 죽는다는 걸 깨닫고 삶을 바라보라는 거죠. 그렇게 되면 삶이 달라져요. 인간은 어차피 죽는다는 생각에 아등바등 살 게 아니다. 돈을 움켜쥐고 살 게 아니다란 생각에 남에게 베풀게 되는거죠. 그 점이 이 작품을 더욱 매력적으로 느끼게 해요.”
30년이 넘는 연기 경력을 지닌 손병호는 극단 목화에서 활동하며 오태석 연출가의 ‘백마강 달밤에’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등에 출연했다. 이후 영화 ‘파이란’에서 악독한 조폭 연기를 보여주어 영화계에서 주목 받은 이후, 수십편의 영화, 드라마에서 개성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최근엔 연극 ‘남자충동’, ‘미친키스’ 등에 잇달아 출연한 것은 물론 최근 종영한 OCN 드라마 ‘구해줘’에서 옥택연의 아버지이자 야욕을 지닌 무지군 군수로 출연해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오펀스’ 이후엔 연극 ‘리어왕’으로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손병호는 30년 연기 인생을 돌아보며, “잘 살아왔다고 말하기 보다는 늘 감사하다”고 표현했다.
“내가 누군가 바라지 않은 ‘연극’이란 걸 알게 됐어요. 가족도 바라지 않고, 그 누구도 바라지 않은 어려운 길을 걸으면서 주위에서 지켜봐주고 부모님이 인정해주고 형제들이 기다려주고, 친척들이 박수쳐줘서 30년이란 시간 동안 연기를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살아있고, 무대에 서 있다고 생각해요. 제 주위의 모든 사람이 절 만들어준거죠. 그래서 감사하다고 생각해. 감사함 때문에 이 자리에 있다고 봅니다.“
‘연극’ 한편이 과연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쉽사리 꿈꿀 수 없었던 꿈을 꾸게 하는 세상이 바로 연극 무대이고, 누군가는 나를 지켜보고 나를 끌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바로 극장이다. 손 배우는 “항상 슬프고, 외롭고, 조금 지쳐있는 이들에게 작은 활력소가 되는 연극이 ‘오펀스’이다”고 했다.
“우선은 이 작품이 따뜻해서 좋았어요. 혼자 살고 있고, 혼술, 혼밥 등 모든 걸 혼자 하는 시대 잖아요. 어차피 인생은 고독하다며 희망적인 사회를 꿈도 꾸지 않는다면 슬프지 않나요. 연극 예술이란 게 뭐겠어요. 어떤 걸 통해 변해간다는 게 하나의 예술이잖아요. 관객들에게 충분히 뭔가를 줄 수 있는 연극입니다. ‘나는 잘 살 수 있어’ 이런 느낌을 받아갔으면 해요. 그게 제가 ‘오펀스’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해요.”
한편, 배우 손병호 박지일 이동하 윤나무 장우진 문성일 김바다 등이 출연하는 연극 ‘오펀스’는 11월 26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공연된다.
/정다훈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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