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정원’은 베스트셀러 소설에 얽힌 미스터리한 사건, 그리고 슬픈 비밀을 그린 작품이다. 홀로 숲 속의 유리정원에서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혈액을 연구하는 과학도 재연(문근영)을 훔쳐보며 초록의 피가 흐르는 여인에 대한 소설을 쓰는 무명작가 지훈(김태훈)의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세상에 밝혀지게 되는 충격적인 비밀을 다룬다.
문근영은 세상에 상처 받고 숲으로 숨어버린 과학도 재연 역을 맡았다. 태어날 때부터 가진 기형적인 신체 때문에 늘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오다 유일하게 자신을 아껴주고 인정해주는 정교수(서태화)를 믿고 따른다. 하지만 정교수가 후배 연구원과 짜고 자신의 연구 아이템을 훔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절망에 빠져 유리정원에 몸을 숨긴다. 이후 소설가 지훈을 만나고 또 한 번 삶이 흔들린다.
일도 사랑도 모두 도난당한 재연은 가련하기 그지없다. 그가 어지러운 도심을 버리고 숲으로 숲으로 자신을 분자화해 밀어내는 모습에서 극도의 감정이입이 되는 건, 언뜻 실제 문근영이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3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문근영은 “긴장도 되고 무서운 것도 많아진 것 같다”며 오랜만에 대중 앞에 서는 심정을 밝혔다. 2015년 ‘사도’ 출연 외 2006년 ‘사랑따윈 필요없어’ 이후 무려 11년 만의 스크린 복귀를 하는 이유도 있지만, 7개월간의 투병에서도 비롯됐다. 문근영은 지난 2월 급성구획증후군을 진단받고 4차례의 수술과 함께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상황이 가볍지는 않았던 터라 많은 이들이 걱정을 표해왔다. 그래도 응원 덕분인지 문근영은 완치된 몸으로 최근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행사부터 정상 활동을 시작했다. 이번 ‘유리정원’이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면서 성공적인 재개를 알렸다.
“찍기는 1년 전쯤에 찍었는데 개봉을 지금 시기에 하면서 복귀작이 됐다. 촬영하면서 탄력을 많이 받은 느낌이었다. 너무 좋았고 행복했던 기분이었고 여운이 남아있다. 재연이라는 캐릭터에 집중해서인지 교차하는 감정들의 여운이 아직도 있다.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 다시 촬영 때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문근영 특유의 싱그러운 이미지와 초록 가득한 동화 같은 ‘유리정원’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그에게도 ‘유리정원’과 재연 캐릭터는 단번에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대본과 역할이 매력적이었다. 이 역할을 잘 이해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고 잘 전달하고 싶었다. 배우로서 ‘내가 재연이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재연이는 상처를 받았던 것과 그걸 풀어가는 방식, 품고 살아가는 방식이 나와 비슷한 것 같았다. 아픔이 있어서 더 그렇게 보였을 수 있다. 그 아픔을 잘 표현하고 싶었다.”
재연은 사랑과 학문에 심취하는 과정에서 순수함을,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이용당한 후에는 파괴와 광기에 젖는 양면을 보여준다. 양극단의 감정선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터.
“나는 재연이가 순수한 인물이라고 하기엔 어려운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 순수해보일까’ 생각했을 때, 무언가에 마음을 다 쏟아서 그런 것 같다. 스스로 무언가를 빼앗길 줄 몰랐다가 점차 빼앗겨보기도 하고 상처를 받으면서 모든 걸 쏟아 붓기가 어려워진 것 같다. 내가 그들에게 줬던 마음이 컸기 때문에 돌아온 칼이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계산을 하지 않고 연기하려 했다. 극단적인 심경의 변화를 보여주기보다 흐름을 보여주고 싶었다. 흐름과 변화의 지점을 자연스레 보여주려 했다. 인물의 감정선을 최대한 따라가려 했다.”
재연의 내면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실제 문근영 또한 서른이 되기까지 수많은 부딪힘 속에서 어딘가에 긁히고 상처도 입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재연이도 자기를 다 줘버려서 아픔을 느낀 것일 거다. 상처는 누구나 받는 것 같다. 반면 상처를 누구나 다 주면서도 산다. 어떤 사람은 같은 상황에서도 상처로 느끼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상처가 되려면 내 마음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 같더라.”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나도 순수한 마음을 주고서 상처가 된 경험이 있었던 것 같아 재연이 이해가 갔다. 상처를 받았을 때 발현시키는 방법도 나와 같았다. 재연이처럼 나도 스스로 극복하려 한다. 내 안으로 들어가는 점이 비슷했다. ‘유리정원’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안전한 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성으로 들어간다는 게, 누군가 이걸 깨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겠다는 생각도 들더라. 양가적인 마음이 이해가 갔다.”
‘유리정원’에서는 재연의 내적 변화뿐만 아니라 외적 변화도 보인다. 잘 정돈된 숏커트에서 어느 순간 정돈되지 않은 어깨선 길이의 장단발이 눈에 띈다. “단발머리는 실제 머리였고, 숏커트만 가발을 썼다. 머리도 더벅머리처럼 보이도록 연출했다. 중간 중간에 숲에 들어와서 자연인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메이크업도 거의 안 했다. 감독님께서 살을 빼달라고 부탁하셔서 5~6kg을 뺐다. 감독님께서 살이 되게 많이 빠진 걸로 보시고 10kg 빠진 걸로 말씀하셨는데 몸무게 변화가 그 정도는 아니었다.(웃음)”
‘유리정원’은 탁월한 스토리텔링과 섬세한 연출력을 자랑하는 신수원 감독의 신작이라는 점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레인보우’로 제23회 도쿄국제영화제 아시아 영화상, 단편 ‘순환선’으로 2012년 제65회 칸영화제 카날플뤼스상, ‘명왕성’으로 제6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수정곰상 특별언급상과 제11회 피렌체 한국영화제 심사위원상, ‘마돈나’로 2015년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초청을 받으며 세계적 감독으로 위상을 떨친 감독이다.
“감독님과는 초반부터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감독님께서도 재연이 감정의 순수, 광기 극단을 오가는 걸 노골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감정의 수위를 찾는 데에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 테이크도 많이 찍었다. 보통 한 테이크를 찍고 다음 테이크를 찍을 때 앞의 것을 보완하기 마련인데, 이번 작품에서는 앞의 테이크와 완전히 다른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감독님께서 잘 만들어주셨다. 단순히 여성 감독이라서 그랬다기보다 성향 자체가 나와 잘 통했던 것 같다. 얘기를 하면서 조율도 잘 됐고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자극을 받았다. 새로운 걸 많이 배웠다. 같이 얘기하면서 공유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서경스타 한해선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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