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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환란 그후 20년] "국가빚이 선진국형 환란 주범...재정건전성 무너지면 외환쓰나미"

<2부> 릴레이 인터뷰-박승 前 한국은행 총재

외화부족·기업부실 등 위기요인 많이 해소됐지만

잠재성장률 추락·양극화로 장기 저성장 위험 직면

선진국형 경제위기는 기업 보다 국가부채가 원인

재정 컨트롤 못하면 '20년전 일본 전철' 밟을 것

가계빚 관리·규제개혁·증세로 나라곳간 튼실케 해야





대담=서정명 정치부장 vicsjm@sedaily.com

“국가의 재정 건전성이 무너지면 순식간에 선진국형 외환위기의 쓰나미가 우리를 덮칠 수 있습니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국민이 떠안아야 할 고통은 결코 짧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정부는 신중한 재정지출을 통해 앞으로 닥칠지 모를 위기에 선제 대응해야 합니다.”

박승(사진) 전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5일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가진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20년 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와 비교해선 기업의 부실 규모는 해소됐지만 여전히 장기 저성장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며 “우리 사회 곳곳에서 퍼지고 있는 경고의 목소리에도 정부가 귀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 경제의 산증인’으로 통하는 박 전 총재는 지난 1997년 IMF 외환위기의 사전징후를 미리 포착하고 1년 전부터 숱한 언론 기고와 강연을 통해 정부와 경제계에 경고음을 보냈다. 그는 당시 경제학자로서 외환위기의 과정을 가장 객관적으로 지켜본 목격자이기도 하다. 올해 여든을 훌쩍 넘긴 고령에도 불구하고 박 전 총재는 1시간30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 내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분명한 어조로 문재인 정부를 향해 아낌없는 고언을 쏟아냈다. 특히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의 싱크탱크인 ‘국민성장’의 자문위원장을 맡았던 그의 애정 어린 조언은 문재인 정부가 소중히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어 보였다.

IMF 외환위기 발생 20년을 맞은 한국 경제의 현 상황을 진단해달라는 주문에 박 전 총재는 “20년 전 대한민국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던 IMF 외환위기 당시와 같은 외환보유액 부족이나 과도한 부채에 따른 기업 부실 등의 위기 요인은 많이 해소됐다”면서도 “하지만 10년 전 5%였던 잠재성장률이 2%대로 떨어지고 사회 양극화로 대표되는 내부 불균형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경제 활력이 떨어지는 장기 저성장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웃 나라 일본과 비교하며 한국 경제의 또 다른 위기 가능성을 경고했다.

“아직 우리나라의 국가재정은 건전한 편에 속하지만 불과 20년 전 일본이 지금의 한국과 같은 재정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국가재정 관리에 실패하면서 국내총생산(GDP)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던 일본의 국가부채비율은 230% 수준까지 치솟았고 재정 건전성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불과 십수년 만에 벌어진 일이죠. 우리라고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처럼 국가의 재정 건전성이 무너질 경우 국가부채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선진국형 외환위기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게 박 전 총재의 경고다. 그는 “20년 전 외환위기가 기업의 과도한 부채에서 비롯된 후진국형 경제위기였다면 우리가 미리 대비해야 할 선진국형 경제위기는 기업부채보다 국가부채가 가장 큰 요인”이라며 “위기가 현실로 닥치기 전에 정부가 선제 대응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박 전 총재가 제시한 위기 관리 해법은 한국 경제의 뇌관이 돼버린 가계부채 관리와 더불어 정부의 신중한 재정지출을 통한 재정 건전성 확보였다. 그는 “현재의 과도한 가계부채가 국가부채로 전이되지 않도록 정부가 잘 관리해야 한다”며 “정권의 임기는 유한한데 임기 내에 과도한 재정 집행을 해버리면 결국 10~20년 새 국가재정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정부가 재정지출에 신중해야 하는 이유”라고 역설했다.

이처럼 국가의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면서도 문재인 정부의 대표 공약인 복지 확대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결국 증세가 수반돼야 한다고 박 전 총재는 단호히 강조했다. ‘공짜 복지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정부가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증세를 하지 않고도 정부의 복지공약을 이행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저는 그 실현 가능성에는 회의적입니다. 더욱이 재정 건전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복지 정책을 펼치기 위해선 이제부터 증세를 본격적으로 검토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정부는 향후 5년간의 복지지출 계획과 소요재원 조달계획에 대한 로드맵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제시하는 것은 물론 결코 복지는 공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박 전 총재가 꼽은 중장기적인 증세의 방향은 법인세와 소득세·종합부동산세 등을 중심으로 고소득자가 더 부담하는 방식이다. 다만 복지를 위한 증세에는 가능한 한 모든 국민이 참여할 수 있도록 ‘국민개세주의’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추가적인 복지재원 마련을 위해 필요하다면 일반 국민 대다수가 부담하는 간접세인 부가가치세까지도 올릴 수 있다는 게 박 전 총재의 아이디어다.



박 전 총재는 문재인 정부가 추구하는 소득주도성장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경제학자다. 과거 수출 주도 대기업의 성장이 가계소득 증대와 국가 경제발전으로 이어지던 낙수효과의 모델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만큼 이제는 반대로 민간의 소비를 늘려 기업과 국가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가는 방식으로 성장모델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수레의 두 바퀴가 함께 굴러가듯이 소득주도성장이 수요 측면의 성장엔진이라면 공급 측면에서도 기업의 생산성 혁신을 통한 혁신성장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박 전 총재가 말하는 혁신성장의 전제조건은 노동개혁과 규제개혁이다. 그는 대선 캠프 시절은 물론 대선 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문재인 대통령에게 노동개혁과 규제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년 전 IMF 외환위기를 불러온 원인 중 하나도 우리 사회가 노동개혁과 규제개혁의 시급성을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이라는 지적이다. 박 전 총재는 노동개혁의 첫걸음으로 대기업 노조의 타협과 양보를 꼽았다.

“노조 가입률이 10%에 불과한 현실에서 노조가 꼭 필요한 영세사업장에는 노조가 없고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는 대기업 노조는 열악한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외면한 채 그들만의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성장의 과실이 노동자들에게도 돌아갈 수 있도록 정책을 펼치는 대신 노동자들은 불합리한 투쟁을 자제하고 일정 부분 고통 분담도 감수하는 노력으로 화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부 강성노조의 태도 변화도 촉구했다. 박 전 총재는 “친노동 정책을 표방하는 진보정권이 출범한 만큼 노조는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식의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면서 “노조가 양보하지 않은 채 무턱대고 투쟁 일변도의 노동운동을 고집해서는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기는커녕 더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 꼬집었다.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 방침에 대해서는 속도 조절을 주문했다. 박 전 총재는 “소득주도성장을 위해선 근로자들이 받는 최저임금을 지속적으로 올려야 한다”면서도 “다만 영세사업장들의 어려움도 함께 감안해 인상 폭은 중용을 지킬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정부가 영세사업자의 최저임금 인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3조원의 자금을 지원하기로 한 것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를 나타냈다. 박 전 총재는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할 경우 시장원리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지원금을 받기 위해 가짜 수요가 생겨나는 등의 여러 부작용이 뒤따를 수 있다”며 보조금 지급은 단기처방에 그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전 총재는 “우리 경제가 제2의 외환위기를 겪지 않기 위해선 무엇보다 국회가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며 정치권을 향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그는 “20년 전 갑작스럽게 외환위기가 터지자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도 국민 여론에 등 떠밀려 정치권도 쫓기듯 일사천리로 법안 처리에 매진했다”며 “하지만 그 후로 20년이 지난 우리 국회는 여전히 당리당략을 앞세운 정쟁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전했다. 이어 “아직도 국회에 계류돼 있는 규제프리존법이나 서비스산업발전법 등을 비롯해 기업들의 경영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관련 법안 처리에 여야 모두 전향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면서 “여당은 야당을 포용할 줄 알고 야당은 반대를 위한 반대만 고집하지 말고 국정 운영에 함께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당부했다./정리=김현상·류호기자 kim0123@sedaily.com 사진=이호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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