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 불평등의 이유를 극명하게 드러냈던 이 부등식을 기억하는가. 역사적으로 자본수익률(r)은 경제성장률(g)을 앞섰다는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실증적 주장이 세상을 뒤흔든 지 3년이 흘렀다. 그 사이 그가 내놓은 700여쪽에 달하는 경제학 서적 ‘20세기 자본’이 30여개국에서 220만부 이상 판매됐고 심지어는 ‘r>g’가 새겨진 티셔츠가 유행하기까지 했다. 대중은 상위 1%의 부자들이 누리는 부의 대물림이 불평등을 심화한다는 의심, 현재 불평등의 수준이 역사상 가장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의심을 통계로 확인하게 된데 열광했다.
‘21세기 자본’서 제기한 문제들
폴 크루그먼·마이클 스펜서 등
경제·사회 각 분야 23명의 석학
검증과 평가의 결과물 한데 모아
피케티의 업적은 불평등을 실증적으로 분석했다는 것, 그리고 불평등 문제를 전 세계의 화두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250년에 걸친 서양 주요국들의 과세자료와 센서스 자료를 분석, 역사적으로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항상 높았다는 경향성을 발견했다. 이는 성과에 기반한 소득보다 상속된 재산의 사회적 역할이 더욱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상속재산의 위력이 커지는 ‘세습자본주의’와 초고액 연봉을 받는 슈퍼스타들의 등장으로 불평등은 갈수록 심화할 수밖에 없다며 이를 억제하기 위해 ‘글로벌 부유세’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발 빠르게 ‘21세기 자본’을 영어로 번역해 프랑스와 거의 동시에 책을 출간했던 하버드대학교 출판부는 ‘피케티 열풍’의 진원지 역할을 한 데 그치지 않고 3년간의 특별 프로젝트를 기획, ‘21세기 자본’이 제기한 문제를 21개 주제로 나눠 23명의 석학들에게 검증과 평가를 요청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로버트 솔로, 마이클 스펜서 등 최고의 경제학자와 사회학, 경제학, 법학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전문가들이 피케티가 던진 화두에 응답했고 ‘애프터 피케티’는 그 결과물을 한데 모은 것이다.
석학들이 제기한 ‘21세기 자본’의 문제점은 분석의 정교함에 집중된다. 경제학자 수레시 나이두는 피케티가 기업의 지배구조, 금융기관의 역할, 노동시장 제도, 정치적 영향력 등 다양한 요소가 부의 분배에 영향을 끼친다고 상정하면서도 검증 과정에는 제도와 정치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한다. 정치학자인 엘리자베스 제이콥스 역시 부의 불평등이 어떻게 권력의 불평등으로 바뀌는지 이해하기 위한 시민사회와 국가관계에 대한 분석이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피케티 스스로 “부와 소득의 불평등에 관한 어떤 경제적 결정론도 경계해야 한다. 부의 분배의 역사는 언제나 매우 정치적이었으며 순전히 경제적인 메커니즘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경제 이외의 요소에 대한 충분한 검증이 이뤄지지 않았고 불평등 해소 과정에서 정치의 역할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는 뼈 아픈 지적이다.
피케티가 역사적 검증 작업에 몰두한 나머지 기술 혁신과 세계화, 기업구조의 변화, 불평등의 지리적 개념 변화 등 현대적 변인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많았다. 지리학자 가레스 존스는 공식 조세기록을 이용해 국민국가 차원에서 경제활동의 구성을 파악하는 피케티의 방식으로는 실제 불평등의 정도를 파악할 수 없다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기업들은 역외 거점 활용(주로 조세피난처), 오프쇼링(경비절감을 위해 해외 생산기지를 구축하거나 해외 용역 활용) 등을 통해 공간의 제약은 물론 납세의 의무, 공개의 의무에서도 자유롭다. 엘리트층 역시 마찬가지. 시티 오브 런던처럼 엘리트의 구미를 맞추려는 도시와 국가들이 거주·납세 등 시민의 의무 없는 시민권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자본의 이동이 자유로워질수록 국민국가 단위의 분석 틀은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 존스가 피케티의 방법론이 사후적이라고 지적하는 이유다. 정보경제학 분야의 석학인 마이클 스펜스와 로라 타이슨은 피케티의 분석이 지난 수십 년간 불평등을 이끈 동인으로 기술변화와 기술로 인한 세계화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앞으로 수십 년간 불평등을 심화시킬 진짜 동력은 인간 노동력을 대체하는 기계, 값싼 노동력으로 대체할 수 있는 세계화라는 점을 짚어준다. 이 역시 피케티 연구에서 보강돼야 할 부분으로 보인다.
21세기 자본과 피케티 방법론의 결점과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이 책은 역설적으로 ‘21세기 자본’의 위대함을 대변한다. 불평등 문제에 대한 담론의 틀을 바꾸고 학제간 연구의 초석을 다졌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남긴 피케티의 말처럼 21세기 자본은 현재진행형의 사회과학 연구작업이다. 전 세계가 피케티의 개념과 방법으로 각국의 불평등 실태를 파악하고 있다. 한국 역시 ‘21세기 자본’ 출간 이후 고소득층에 대한 과소평가 문제가 있는 센서스(표본 추출 방식) 자료 대신 과세자료로 불평등 정도를 파악하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세법 개정을 통해 각국의 데이터가 쌓이고 시대별, 국가별, 지역별 분석과 비교가 가능해지면 전 세계가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방법론을 고민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피케티가 제시한 글로벌 부유세보다 더 실현 가능성이 높은 대안들이 나올 것이다.
이번 저술에도 참여한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가 피케티 이론의 상당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술이 향후 10년간 최고의 경제학 서적이 될 것이라는 찬사를 보낸 것도 이 때문이다.
21세기 자본이 출간된 지 3년이 흘렀지만 피케티의 이론은 여전히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책의 마지막에서 피케티는 각각의 비판에 반론을 제기하거나 보충 설명하며 학제간 연구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그는 “불평등의 역사는 연관된 모든 행위자가 함께 만든 합작품”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그가 던진 화두의 끝은 “자본주의의 민주적 통제”를 위해 함께 행동하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한국의 경제학계, 나아가 다양한 학계의 브레인들이 모여 피케티 이론을 토대로 한국형 21세기 자본을 완성해 가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얼굴을 붉히지 않고 서로의 방법론에 드러난 모순을 지적하며 건설적으로 비평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장면을 그려본다. 이 책의 충실한 내용에 더해 세계적인 석학들의 건설적인 논쟁이 더욱 감명 깊게 다가온 이유다. 3만8,000원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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