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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부채 통치] 빚 1,450조...갚는 삶은 계속된다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지음, 갈무리 펴냄

'부채인간' 개념 창시자 랏자라또

현대사회 기본축 채무-채권자로 규정

마이너스통장·카드론·담보대출 등

촘촘한 은행 부채의 굴레 벗어날 수 없어

열심히 일해도 빚지는 현대사회 비판

2013년 브라질 봉기 당시, 브라질 경제의 중심지 상파울루 파울리스타 대로를 3만여명의 시위대가 점거했다. /사진제공=위키피디아




돈을 빌리기 위해 은행 대출 창구를 들러 신용등급을 확인할 때면 누구나 한 번쯤 듣는 조언이 있다. 신용을 쓸수록 등급이 좋아진다는 것. 마이너스 통장이나 카드론으로 돈을 빌리고, 각종 담보 대출을 일으켜 충실이 갚은 기록이 있는 채무자의 신용등급은 은행 문턱 한 번 드나들지 않고 자기 지갑에서만 돈을 꺼내 쓰며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의 신용등급에 비할 바가 아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는 이상 대출 없인 내 집 마련은커녕 자동차 한 대 사기 어려운 요즘, 신용등급이 이 땅에 사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권리의 척도라면 채무자가 되지 않고선 우리가 그 어떤 주권도 누릴 수 없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채무자가 되는 운명의 시점은 갈수록 빨라지고 있으며, 평범한 개인들을 채무자로 포획하는 그물망은 갈수록 촘촘해지고 있다. 갈수록 높아지는 대학 등록금은 갓 스무살의 청춘들을 빚의 굴레로 인도한다. 1조4,000억 달러 이상의 학자금 대출 규모가 경제 뇌관으로 점쳐지고 있는 미국의 대학에는 대다수의 채무자들과 소수의 부유한 채권자 자녀들이 공존하며 하나의 계급 사회를 형성한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두 갈래의 길을 따라 하나는 철저히 워킹푸어, 하우스푸어의 삶을 살아간다.

2011년 ‘시드니를 점거하라(Occupy Sydney)’ 시위 당시 ‘시스템 에러. 자본주의는 실패했다. 우리가 99%다. 점거하라!’라고 적은 플랜카드가 나부끼고 있다. /사진제공=플리커


‘부채인간’(Homo Debitor) 개념을 창시한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마우리치오 랏자라또는 채권자-채무자 관계가 현대사회를 이루는 기본 관계라고 규정한다. 초기 자본주의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기본 관계를 구축했지만 생산성을 잃은 자본은 채권을 소유함으로써 억압과 통치의 구조를 이어가게 됐다는 것. 공고한 권력관계 속에 채무자에겐 미래가 없다. 오직 ‘갚는 삶’이 있을 뿐이다. 정치적 목소리조차 낼 겨를이 없다. ‘빚이나 지고 사는 실패한 삶’이라는 낙인은 채무자에게 계급의식은커녕 이를 바탕으로 한 정치 담론 형성의 권한도 주지 않는다. 이 가운데 대의민주주의는 채권자에게만 봉사하니 기울어진 운동장이 바로 세워질 리 만무하다. 1980년대 보수의 시대를 거치며 소득세는 낮아지고 소득분배는 불평등하고 경제는 침체하고 있다. 거대 자본의 조세회피는 극심해졌다. 그 결과 미국 국민의 1%가 국부의 40%를 소유하고, 30년간 99%의 미국인이 15%의 소득증대를 경험하는 동안 상위 1%의 소득은 150% 늘었다.

한 가지 눈여겨볼 대목은 공공부채 프레임이다. 위기의 세계화는 공공부채의 세계화이기도 했다. 모든 나라가 GDP의 몇 배를 웃도는 부채를 짊어졌다. 이 가운데 시장을 살리고 번영을 구가하기 위해서는 국가 부채를 줄이는데 온 국민이 동참해야 하며 사회보장과 복지 축소 등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가 반박불가 대명제가 된 지 오래다. 단적인 예가 그리스 부채였다. 그리스 국민들은 나라의 부채를 고스란히 자신들의 빚으로 떠안게 됐고 ‘게으른 죄인’이라는 전 세계의 지탄을 받으며, 복지는 물론 기본권마저 박탈당한채 독일 은행에 진 빚을 갚았다.



이때 랏자라또는 니체를 소환한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에서 인간 억압의 역사는 기독교적 원죄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의 인간은 하느님의 은혜로 태어나 어리석게도 죄를 지었다. 사후 지옥에 갈 운명에 인간은 평생을 자신이 짓지도 않은 벌을 갚는데 열중한다. 근대의 억압은 사회계약이다. 다 같이 잘 살고자 만든 사회 규칙을 어긴 개인은 그것이 누군가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았어도 공공의 적이 되어 죗값을 치른다. 이제 우리를 억압하는 대상, 우리가 죗값을 치러야 할 대상은 은행이다. 어리석고 약한 자는 은행에 죄(부채)를 짓고 평생을 되갚는다.



2011년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 당시 한 시위자가 텐트 위에 ‘지금 전 지구적인 진짜 민주주의를!’ 이라고 적은 팻말을 붙여놨다. /사진제공=위키피디아


‘내가 원죄를 지었나.’ ‘나는 벌을 받아 마땅한가.’ ‘벌을 집행하는 자들은 신인가.’ 나아가 ‘평생을 빚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 세상은 내 탓인가.’ ‘채무자라는 이유로 실패한 삶을 살았다는 낙인은 온당한가.’ 저자는 숱한 물음들 속에 99%가 빚쟁이인 사회, ‘신자유주의 질서 외엔 대안이 없다’는 세상에 작은 균열을 내고자 한다. 아니 책의 궁극적 목적은 은행과 부자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사회에 대한 반격이요 세력 결집이다. 2014년 프랑스에서 소개된 이 책은 가계부채 1,450조원 시대를 열어젖힌 한국을, 숱한 채무자들을 다른 눈으로 성찰하게 한다. 그러나 논리의 전개나 대안 제시 등 그 어떤 면도 2012년 국내에 소개된 전작 ‘부채 인간’에서 한 발치도 나아가지 못한 점은 아쉽다. 1만8,000원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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