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재 시스템의 나라’ 일본도 태풍에 장마까지 겹친 천재지변은 이기지 못했다. 태풍 쁘라삐룬으로 한차례 난리를 겪은 서일본 지역에 장맛비까지 쏟아지자 곳곳에서 산사태·하천범람·홍수 등 재난이 속출했다. 여전히 각지에서 국지성 호우가 내리는데다 태풍 마리아의 진로도 쉽게 예상할 수 없어 일본 열도는 긴장감에 휩싸여 있다.
마이니치신문은 아베 신조 총리가 8일 비상재해대책본부를 설치하고 도쿄 총리관저에서 회의를 열었다고 보도했다. 비상재해대책본부는 국가적 재난에 대응하기 위해 총리가 임시 설치하는 기구로 지난 2016년 구마모토 지진 이후 2년 만에 처음으로 구성됐다. 아베 총리는 회의에서 “막대한 피해가 광역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이재민 지원에 선제 대응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10시30분 기준 NHK가 집계한 사망자는 83명이며 도로 단절이나 침수로 연락이 두절돼 아직 안부가 확인되지 않은 사람도 57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서 호우로 80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5일부터 규슈·주고쿠·긴키 등 서일본 지방을 중심으로 내린 강우량은 기록적이다. 일본 기후현 기상청에 따르면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간 3일 오후9시부터 8일 오전8시까지의 총 강우량은 군조시 1,050.5㎜, 세키시 895㎜로 집계됐다. 일본 기상청은 9일 오전6시까지 24시간 동안 시코쿠 300㎜, 도카이 200㎜, 규슈 150㎜의 강우량을 예보해 여전히 서일본 지방 전역에서 폭우가 이어지는 상황이다. 전날 기후현을 제외한 도도부현(광역지방자치단체)에 대한 폭우특별경보가 해제됐지만 기상청은 이날 오전 고치현과 에히메현에 다시 추가 경보를 발령한 상태다. 기상청은 “지금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폭우”라며 “특별경보가 발표되지 않은 서일본과 동일본에서도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고 주의를 당부했다.
숨돌릴 새 없이 내리는 폭우로 재난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히로시마현에서는 산사태로 5명이 숨졌으며 에히메현 세이요시에서는 강이 범람해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후쿠오카 기상대는 “규슈 북부는 지금까지의 폭우로 지반이 느슨해져 약간의 비에도 토사 재해가 발생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교토부·에히메현 등 서일본 전역에도 자위대 2,300명이 투입되는 등 구조·재해 지원에 관군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최악의 폭우사태로 기업활동에도 제동이 걸렸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야마토운수가 7일 오후3시부로 주고쿠·시코쿠·규슈 등지에서 농산물 배송을 중단했으며 운송 재개 일정도 불명확하다고 전했다. 아마존재팬도 도로 침수로 오카야마현 물류창고 가동을 멈추는 등 유통·운수업계가 직격타를 입었다. 일본 자동차업체 도요타그룹 산하의 다이하쓰공업은 오사카부 본사 공장을 포함해 긴키·규슈 지역 차량생산 공장 4곳에서 9일 낮까지 조업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서일본 지방을 중심으로 한 기록적인 폭우는 태풍 쁘라삐룬과 편서풍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장마전선이 강화됐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6월 말만 해도 일본 기상청은 장마전선이 한국으로 북상하면서 대규모 호우 가능성이 작다고 내다봤지만 지난주 7호 태풍 쁘라삐룬이 북상해 동해상에서 소멸하면서 장마전선이 내려왔고 다량의 수증기까지 전선에 유입됐다. 여기에 편서풍이 오호츠크해 기단과 북태평양 기단의 충돌을 부추기며 장마전선이 더욱 강화됐다. 일본 정부가 손 쓸 새도 없이 잇따른 재해에 당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8호 태풍 마리아까지 북상하고 있어 일본은 그 진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마리아가 예상대로 중국 대륙을 향한다면 북태평양 고기압의 세력이 강해져 장마전선이 북상할 가능성이 크지만 일본 쪽으로 선회하면 서일본에 다시 습한 공기가 유입돼 또다시 폭우가 쏟아질 수 있다.
/변재현기자 humbleness@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