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와 한국 정부 사이의 8,000억원대 투자자-국가소송(ISD)이 현실화된 데 따라 중재지·중재인 선정 등 ‘첫 관문’부터 치열한 기싸움이 점쳐지고 있다. 중재지·중재인 결정이 앞으로 ISD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어 국내 국제중재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엘리엇·한국 정부간 논의가 장기화될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15일 법조계에 따르면 엘리엇 측은 유엔상거래법위원회(UNCITRAL) 중재 규칙에 따라 중재지로 영국을 제안했으나 한국 정부는 현재까지 동의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다. 유엔상법위 중재규칙에서는 중재지 선정에 양측 합의가 필요하다고 규정한다. 또 양측이 중재지를 어디로 정할지 동의하지 않으면, 앞으로 선정할 중재인으로 구성되는 중재재판부에서 결정한다. 결국 중재인·중재지 등이 결정될 때까지 ISD 절차가 차일피일 늦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엘리엇은 지난 4월 13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수인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부당 조치로 대규모 피해를 봤다”며 우리 정부에 중재 의향서를 제출했다. 이후 90일간 협상에 나섰으나 성과를 내지 못하고 결국 지난 14일 8,000억원대 ISD 제소로 이어졌다. 현재 엘리엇이 주장하는 손실 금액은 7억7,000만달러(약 8,654억원)으로 석 달 전 중재의향서 제출 때보다 1억달러(약 1,124억원)이 늘었다.
양측이 쉽게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중재지 선정이 ISD 과정에서 중요한 첫 관문으로 여겨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유엔상법위는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와는 달리 중재규칙에서 중재지 법률에 따라 취소 소송 등을 허용하고 있다. 게다가 유엔상법위 중재규칙과 더불어 현지법이 ISD 과정에 각종 변수로 작용할 수 있는 터라 통상 소송 주체인 양측은 중재지 선정을 두고 이른바 ‘주판알 튕기기’에 나설 수밖에 없다.
한 국내 국제중재 전문 변호사는 “영국은 현지 법률상 ISD 판결 취소 소송이 가능하다”며 “영국으로 중재지가 결정될 경우 유엔상법위 중재판정부의 판정을 취소하는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터라 우리 정부 측도 이를 두고 유불리를 따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중재인 선정도 한국 정부·엘리엇 측이 치열한 신경전을 벌일 수 있는 부분이다. 유엔상법위 중재규칙에서는 통상 3인 체제의 중재인이 구성된다. 한국 정부와 엘리엇이 각자 1명의 중재인을 선임할 수 있다. 이어 양측이 선임한 중재인은 중재판정부 의장 역할을 할 중재인을 뽑는 등 3인이 참여하는 구조다. 하지만 유엔 상법위 중재 규칙상 양측은 각각 선정한 중재인을 독립성·공정성을 이유로 거부(기피)할 수 있는 터라 선임 과정이 순탄치 않을 수 있다.
한 국내 법조계 관계자는 “중재지·중재인 선정 이후 양측간 본격적인 두뇌 싸움이 시작될 수 있다”며 “그 과정에서는 과거 엘리엇에 삼성 측에 지분을 매도한 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또 현재 진행 중인 국정농단 사태 재판 결과 등이 분쟁의 핵심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현덕기자 alway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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