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함무라비’에 등장한 판사들의 얼굴은 각양각색이었다, 열혈 판사, 냉철한 판사, 이기적인 판사, 성숙한 판사… 그리고 꼰대.
류덕환은 유일하게 판사같지 않은 판사를 연기했다, 보통은 능청스럽고, 필요할땐 진지한, 그리고 연애에는 수줍은. 그래서일까 극본을 쓴 문유석 판사는 류덕환이 연기한 정보왕를 두고 자신을 가장 많이 투영한 캐릭터라고 표현했다. 작가가 자기 자신을 담아낸 인물, 그리고 이를 완벽하게 표현해낸 배우.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호흡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최근 종영한 JTBC ‘미스 함무라비’에서 류덕환은 중앙지법 최고의 마당발 판사를 연기하며 작품의 활력소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어느 때보다 화기애애한 촬영이었다”는 류덕환은 “즐거웠다, 행복했다”는 이야기를 연달아 쏟아냈다.
“마지막 방송을 다 같이 모여서 봤다. 사전제작 드라마라 오랜만에 만나 다들 서먹하거나 어색할 줄 알았는데 막내 스태프까지 한 명도 빠짐없이 반가웠다. 그날 술판이 난리나게 벌어졌다.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현장에서 참 행복하게 촬영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류덕환이 그린 정보왕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압축한 듯한 느낌이었다. 남다른 친화력으로 깨방정을 떨며 선배들과의 술자리를 주도할 때도, 서툰 표현으로 이도연(이엘리야)에게 진심을 전할 때도, 올곧은 지지가 필요한 시점 박차오름(고아라)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때도 그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코미디는 늘 어렵다. 내 기준에서 가장 어려운 연기다. 코믹한 인물을 잘 표현한다는 것은 그만큼 잘 내려놓는다는 거다. 만들어진 것은 코미디가 될 수 없다. 최대한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현장에 가서 만들어내는 부분이 많다. 주면 사물이나 상대방의 말, 인물이 처한 상황을 이용하려 한다. 특히 소품을 보고 상황에 맞게 활용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한다. 이제 습관화가 돼서 자연스럽다.”
인물을 수월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젊은 배우들간의 호흡 덕분이었다. 열혈 판사 고아라, 엘리트판사 김명수, 로맨스를 함께한 이엘리야까지, 류덕환은 “서로 잘 주고 받았다. 모두가 확고한 캐릭터를 잡았던 덕분에 특별히 맞춰줄 것도 없었다”고 칭찬했다.
무엇보다 ‘파트너’ 이엘리야와의 호흡은 아주 편하고 자연스러웠다. 장면별로 합의나 토론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호흡이 잘 맞았다고. 화제로 떠오른 계단 키스신도 큰 부담 없이 임할 수 있었다. 이엘리야가 KBS2 ‘쌈 마이웨이’ 이후 키스신에 망설일때,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며 자연스러움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항상 자신있어 하던 친구가 키스신이 있는 날에는 주춤하더라. ‘쌈 마이웨이’를 봤지만 그런 반응이 나왔는지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몰랐다. 처음 보는 모습에 당황스러워서 물어봤더니 ‘저랑 키스신 하는데 조금 그렇지 않으세요?’하고 묻더라. ‘너무 설레냐고?’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이런 이미지가 있는데 오빠도 휩싸이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해줬다.”
류덕환이 보기에 이도연은 여자가 보기에도 멋진 인물이었다. 여기서 주춤한다면 연약한 여자가 될 수밖에 없어 보였다고. 그래서 류덕환은 이엘리야에게 “이 신에서만큼은 멋있음을 온전히 표현했으면 좋겠다. 이 신을 네가 리드한다면 어떤 것을 해도 멋있게 보일 거다. 뒤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조언했다.
덕분에 키스신은 더할 나위 없이 귀엽고 유쾌한 장면으로 완성됐다. 정보왕은 계단에서 이도연과 키스하며 손을 어디에 둘지 몰랐다. 그는 “정보왕은 도연에 대해 항상 조심스럽다. 이 사람과 입맞춤을 한다는 것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그 와중에도 이러면 안 된다고 배려할 것 같았다”며 “실제로 계단이 불편하기도 했고 그렇게 캐릭터로서 연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미스 함무라비’는 극중 사례를 통해 여성이 직장 및 사회에서 겪는 성차별을 조명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너무 여성의 편만 드는 것 아니냐’는 반응을 얻기도 했다.
“‘가슴털 부장’이 20대 여성에게 자기 사진을 찍어서 보내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너무 오버스럽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작가님이 실제 있던 이야기라고 하더라. 내가 아직도 사회를 전혀 모르고 있구나 싶어 충격받았다.”
“남자들은 다 잘못됐다면서 여성의 입장만 들어주는 드라마는 아니었다. ‘무조건 평등해야 한다’가 아니라 다름을 존중해주자는 거다. 말할 수 없는 입장에 대해 빨리 말하라고 강요하고 캐내는 것이 아니라,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게 중요하지 않나.”
극본을 집필한 문유석 작가는 판사다. 덕분에 장르물로서의 완성도가 높다는 평을 받았다. 류덕환은 “작가가 직업이 따로 있다는 점부터 많이 달랐다. 실제 본인이 겪은 일에 드라마적 요소를 넣어 이야기를 풀어낸 것 자체가 대단한 용기”라고 말했다.
“자신의 경험담을 세상에 보여주는 이야기로 만들었다는 건 등을 돌릴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완성해낸 용기있는 작가님이었다.”
“‘미스 함무라비’에는 모든 캐릭터에 작가 자신이 투영됐다. 정보왕은 순수함, 배려, 피해를 끼치지 말아야겠다는 방어의식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던 모습은 박차오름, 정의감에 쌓여있다고 착각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했던 인물은 임바름(김명수), 가장 좋게 생각했던 선배는 한세상(성동일), 가장 최근 본인의 모습과 일에 대해 표현한 인물이 이도연(이엘리야)이었다.”
/양지연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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