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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서체'로 세상을 냉소하다

['박이소:기록과 기억'展]

패션잡지에 서툰 궁서체 한글 입혀

모순된 언어·문화 정체성 꼬집어

자본주의 - 예술 경계서 줄타기도

오늘부터 현대미술관 과천관 전시

박이소 ‘이그조틱-마이노리티-오리엔탈’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천재 예술가들 중 반세기를 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한 경우가 꽤 있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나 조르주 쇠라(1859~1891)뿐 아니라 국내 작가로 이중섭(1916~1956)과 손상기(1949~1988)가 그랬고 최욱경(1940~1985)도 마찬가지였다. 사고사였지만 이인성(1912~1950)도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떴다. 그래서 불꽃처럼 뜨겁게 살았다는 수식어가 따라붙곤 한다.

여기, 너무 일찍 진 별 하나가 또 있다. 박이소(1957~2004)다. 본명 박철호 대신 1980년대 뉴욕에서는 ‘박모(某·아무개)’로,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박이소(異素·낯설고 소박하다)’로 살았던 작가이자 기획자 겸 교육자, 이론가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박이소:기록과 기억’ 전을 26일부터 오는 12월16일까지 과천관 1전시실에서 개최한다. 50여 점의 작품과 유족이 기증한 드로잉·비디오·기록물 등 아카이브 200여 점을 통해 불꽃처럼 살다 간 작가의 생애와 예술을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1990년작인 ‘이그조틱-마이노리티-오리엔탈’은 패션잡지에 나오는 인물 사진에 일명 그의 ‘바보 서예’라 불리는 서툰 궁서체 한글로 ‘이그조틱’ 등을 써넣은 작품이다. 외국인에게 한글은 신비로워 보일 수 있지만 한국인에게는 어설프게 전통을 흉내 낸 그림으로 보일 뿐이라는 것을 꼬집었다. 뉴욕 브루클린 지역에 실험적 대안공간인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를 설립해 이민자와 소수자를 배려했던 작가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다.

박이소 2002년작 ‘바캉스를 위한 드로잉’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종이에 커피, 콜라, 간장으로 별을 그린 ‘쓰리 스타 쇼’도 은유적이다. 흐릿하게 보이는 세 개의 별이 겉으로는 색깔과 형태가 비슷해 설명 없인 그 정체를 구별하기 어렵다. 작가는 이를 두고 “나는 구별할 수 있고 너희는 구별할 수 없음에 대한 약 올리기다”라고 설명했다. 검은 액체라는 동질성이 있으나 각 액체의 맛과 향이 다르다는 점으로 언어와 문화 정체성의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전시는 유약하고 나른하지만 따가울 정도로 냉소적인 박이소 작품세계의 깊은 진정성과 교감하게 한다.

과천관 입구 야외전시장에는 철근과 콘크리트로 된 배 모양의 작품 ‘무제’를 볼 수 있다. 생전에 부숴버린 것을 재현한 것. 미술관 앞에서 찍은 박이소의 사진을 토대로 작가가 섰던 딱 그 자리에 배를 놓았다. 동서양과 남북한의 경계를 고민하고 전통과 현대, 자본주의와 예술의 경계에서 줄타기하던 작가의 자화상 같다.

마지막 유작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선보인다. 박이소는 2004년 부산비엔날레 개막을 앞두고 ‘우리는 행복해요’의 아이디어 스케치와 지시문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방송으로 접한 북한 체제 선전물을 보고 착안한 작품이다. “우리는 행복해요”라는, 행복한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닌 모순적인 구호는 우리가 진정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되묻게 한다. 이 작품은 다음 달 서울관 옥상에 길이 약 25m, 높이 6m의 대형 입간판으로 설치돼 촛불이 뜨거웠던 광장을 내려다볼 예정이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박이소가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대표로 참여했을 당시의 작품들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재현됐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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