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국인 터키를 최악의 금융위기 직전까지 내몰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압박 외교로 지난해 트럼프 정부 취임 이후 불거진 기존 국제질서의 균열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과거 우방과 신흥국들에 ‘우산’ 역할을 자처해온 미국이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철저한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국제사회의 안정을 뒤흔들고 있는 가운데 터키와 중국·이란·러시아 등 미국의 공격적인 제재에 노출된 국가들은 반미 연대 구축에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 등 국제정치 판도는 분열된 서구와 중·러가 주축이 된 반미 연대가 뒤얽히며 한층 복잡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12일(현지시간) 대미관계 악화로 리라화 폭락 사태를 맞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미국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고 새로운 동맹을 찾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날 흑해 연안 트라브존에서 열린 행사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 경제전쟁을 벌인 나라를 향해 우리는 새로운 시장으로, 새로운 협력관계로, 새로운 동맹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답할 것”이라며 “인구 8,100만의 나라와 맺은 전략적 관계와 반세기 동맹을 희생시키는 나라에 우리는 작별을 고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대외부채 문제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터키를 향해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폭탄’ 투하를 예고하며 경제를 벼랑 끝으로 몰자 새로운 동맹을 통해 살길을 찾아 나서겠다고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이기도 한 터키와 미국의 관계가 결별 수순으로 치닫는 것은 과거와 달라진 미국의 변심 때문이라는 분석이 주를 이룬다. 경제·안보 등 위기에 직면한 국가에 도움을 주며 구원투수 역할을 한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앞세우며 오히려 위기를 증폭시키자 터키가 미국의 적대국인 이란·러시아와 거리를 바짝 좁히며 대외관계에서 대안 모색에 나섰다는 것이다.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기존의 글로벌 패권 인프라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게 됐다”며 “미국은 부담이 큰 다자주의보다는 미국의 이익을 확실히 챙길 수 있는 힘을 바탕으로 한 양자적 관계 구축에 몰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 외교정책의 변화는 이미 캐나다는 물론 러시아와 맞서기 위해 조직된 나토 회원국 등 전통적인 우방국들에도 적용되고 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기존 국제질서에 대한 부담을 짊어지기보다는 미국의 이익에 따라 적도 우방도 없는 ‘각자도생’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외신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가뜩이나 불만을 갖고 있는 터키와의 동맹관계를 살리기보다는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터키의 미국인 목사 억류를 문제 삼아 백인 기독교 계층의 표심을 잡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미국의 이러한 행보로 기존 질서가 흔들리면서 국제사회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새로운 경제 동맹 찾기에 나선 터키가 러시아·중국·카타르 등과 같은 나라와 새로운 동맹을 맺을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나토 회원국과의 관계를 더욱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앞서 터키는 미국의 적성국인 이란과 러시아 등과 안보협력을 강화하는 등 미국과 맞서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CNBC도 트럼프에 밀린 터키가 서구와의 관계를 끊고 다른 동맹국을 찾으면서 미국이 원하지 않는 지정학적 동맹이 만들어질 가능성을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터키 때리기’가 미국과의 외교안보 신냉전에 나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되지만 터키 등 신흥국에 대한 제재 공세가 오히려 러시아·중국 등을 주축으로 하는 반미 연대를 공고하게 만들어 미국에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 러시아는 미국과의 외교안보 패권 싸움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미국과 거리를 두는 국가들에 대한 구애를 강화하며 기존 국제질서의 틀을 흔들고 있다. 지난 4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첫 해외 방문지로 터키를 찾아 러시아제 방공 미사일인 S-400을 공급하기로 합의를 이끌어 낸 바 있고 최근 미국과의 갈등이 더욱 심해지자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을 터키로 급파해 터키 끌어안기에 힘을 쏟고 있다. 러시아는 경제적으로도 미국의 강력한 무기인 달러화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러시아 은행이 달러화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외국과의 교역 때 유로나 위안화로 결제하도록 하고 있다.
여기에 새로운 패권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은 미국의 제재에도 이란산 원유 수입을 추진하는 등 미국이 저버린 패권 인프라에서 자리 잡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앞으로 국제질서는 더욱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중국은 양제츠 외교담당 정치국원을 14일 러시아로 보내 중·러 전략 안보 대화를 진행하는 등 양국이 반미동맹을 강화할 조짐도 보이고 있다. 두 나라 모두 미국의 강도 높은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만큼 협력 강화를 통해 미국 제재에 맞설 힘을 키울 것으로 보인다.
/노현섭기자 hit812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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