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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바스라





페르시아 지역에서 전해오는 설화를 엮은 ‘아라비안나이트’에는 신드바드의 이야기가 나온다. 신드바드는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의 유산으로 바그다드에서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아 있는 재산이 거의 없었다. 신드바드는 남은 재산을 모두 팔아 선박과 상품을 산 뒤 동방과의 교역에 나선다. 신드바드는 일곱 번이나 인도양을 왕래하며 숱한 어려움을 겪은 끝에 바그다드의 부자가 된다. 이때 신드바드가 인도양에 있는 나라들과의 교역을 위해 출항한 항구가 바스라다.

바스라는 페르시아만에 가깝고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에 접근하기도 쉬운 요충지였다. 이런 이유로 바스라는 636년 이슬람제국의 제2대 칼리파인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에 의해 동방 공략을 위한 군사기지로 건설됐다. 이후 우마르는 바스라를 근거지로 해 시리아와 이라크·이집트·이란까지 제국의 영토를 넓혔다. 8~9세기 바스라는 페르시아만 최대의 무역항으로 부상하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물품의 집산지가 됐다. 17~18세기에는 영국·네덜란드·포르투갈의 무역상들이 들어오면서 번성기를 구가했다. 1948년 주바이르에서 유전이 발견된 후 바스라는 이라크 최대의 유전도시가 됐다.



하지만 페르시아만의 주요 항구라는 지정학적 위치는 이런저런 전쟁에 얽히는 계기가 됐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영국이 오스만제국을 물리치고 바스라를 장악하기도 했고 1980년 9월부터 1988년 8월까지 8년에 걸친 이란-이라크전쟁 때는 이란군의 포격으로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1991년 걸프전에서는 미국이 주도한 다국적군이 각종 첨단 병기를 동원해 10만회 이상 공중폭격을 함으로써 유정과 시가지가 파괴됐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2014년 이슬람국가(IS) 격퇴전까지 겪으면서 바스라는 그야말로 초토화됐다.

그 후유증 때문일까. 최근 바스라에서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대규모의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지난 4~8일에는 시위대와 군경이 충돌하면서 2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잇단 전쟁으로 사회 인프라가 모두 파괴되자 주민들은 “우리는 목마르고 배고프고 아프다”며 정부에 대책 마련을 호소하고 있다. 바스라 시위를 보면 지정학적 요충지의 아픔이 느껴진다. 모쪼록 바스라 주민들이 파괴를 딛고 다시 일어서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오철수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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