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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의 예(藝)-<81>이강소 '무제 91182'] 외로이 떠 있는 빈 배...무심한 붓질로 그려낸 詩같은 풍경

검푸른 하늘 배경에 흰 구름 하나

붓 가는 대로 그렸다 지우기 반복

의도하지 않은 풍부한 의미 함축

전시장에 닭·선술집, 누드 페인팅...

70년대 풍미한 실험미술 대표작가

"내 작품은 보는 사람과의 관계 중시"

이강소 ‘무제 91182’ 1991년, 218.2x333.3cm 캔버스에 유화.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살아있는 닭의 발목을 멍석 위 말뚝에 묶어뒀다. 반경 570㎝의 공간이 제 세상이 됐다. 화가 이강소(75)는 멍석 주변에 흰가루를 뿌려놓고 닭이 움직인 흔적이 흰 발자국으로 남게 했다. 그가 서른 두 살 때 일이다. 겁에 질린 닭이 꼼짝 않을까봐 군데군데 먹이를 뿌려둔 덕에 닭은 사흘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닭이 그린(?) 작품이 사진과 설치물로 고스란히 남았다. 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소장한 이강소의 대표작 ‘무제75031’다. 이 작품은 1975년 파리시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린 제9회 파리비엔날레에서 첫선을 보였다. 당시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물방울’ 화가 김창열이 고국에서 온 후배를 위해 기꺼이 헤매고 다녀 생닭을 구해다 줬다. 이른바 ‘닭 퍼포먼스’로 현지 언론이 발칵 뒤집혔고 개막식 날 저녁, 화가는 홍익대 교수였던 미술평론가 이일(1932~1997)과 함께 프랑스 제2국영TV에 불려 나갔다. 이일은 프랑스 국립소르본느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해 나름 불어가 유창했기에 이강소의 작품이 갖는 ‘과정’의 의미와 함께 “계산된 의도에 따라서가 아니라 의도 너머에서 이뤄지는 일종의 여분(餘分)이 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임을 잘 설명했으리라. 3일 고생 끝에 무사히 농장으로 돌아갔으니 더이상 전시장에 존재하지 않는 닭은 그 너저분한 발자국 흔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키며 ‘실존이란 무엇인가’를 되물었다. 문제의 그 작업이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에서 ‘소멸’이라는 제목으로 재연돼 14일까지 선보인다. 최대한 그때 분위기를 되살려 개막일에 맞춰 닭도 갖다 뒀다. 전시에 대한 평가보다 동물학대 논란이 더 거세게 일었다. 동물애호단체의 반대시위가 열렸고 비난여론이 따라 붙었다. 역시, 살아있는 생명체를 전시장에 놓는다는 것은 43년 전은 물론 지금도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작가 이강소는 3일동안 말뚝에 묶였던 닭이 만든 흰 발자국과 그 흔적을 ‘무제75031’로 1975년 파리비엔날레에서 선보였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프랑스 시인 자크 프레베르(1900~1977)가 그랬다. “우선 문 열린/ 새장을 하나 그릴 것/…(중략) 새가 새장에 들어가기를 기다릴 것/ 그가 새장에 들어가거든/ 살며시 붓으로 새장을 닫을 것/ 그리고/ 차례로 모든 창살을 지우되/ 새의 깃털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할 것…” 시의 제목은 ‘어느 새의 초상화를 그리려면’이다. 이강소의 퍼포먼스는 어쩌면 시인의 얘기한 ‘새의 초상화’가 아닐까. 초상화라는 게 닭 머리, 날개, 닭발 식으로 그 껍데기를 그리는 게 아니라 그 진정한 ‘존재’를 기록했으니 참모습 아니려나. 나아가 이 초상화는 닭과 새뿐만 아니라 인간에까지, 살아 꿈틀대고 돌아다니는 모든 것들로 확장해 적용해 볼 수 있다.

이강소는 일제 시대 말기인 1943년에, 보수적이라는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대를 풍미한 ‘한국 실험미술’의 대표작가가 됐다. 범인(凡人)들이 기행으로 분류하는 소위 ‘누드 퍼포먼스’를 이미 1977년에 행했다. 벌거벗은 작가가 온몸에 물감을 칠했다. 한창 나이라 탄탄한 몸이다. 손바닥 만한 큰 붓부터 가는 붓까지 바꿔 들어가며 팔뚝과 옆구리, 이마까지 꼼꼼하게 칠한 다음 캔버스 용으로 쓰이기도 하는 광목 천으로 물감을 닦아냈다. 그 법석의 현장이 작품 ‘페인팅(이벤트77-2)’로 남았다.

작가 이강소는 자신의 몸에 물감을 칠한 후 이를 광목천으로 닦아내는 퍼포먼스를 벌인 뒤 ‘페인팅(이벤트77-2)’라는 작품으로 남겼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작가 이강소는 자신의 몸에 물감을 칠한 후 이를 광목천으로 닦아내는 퍼포먼스를 벌인 뒤 ‘페인팅(이벤트77-2)’라는 작품으로 남겼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제 몸에 붓질하는 나신(裸身)의 화가 모습은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 펴냄)를 떠올리게 한다. “먼저 그녀의 어깨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목덜미에서부터 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주와 빨강의 반쯤 열린 꽃봉오리들이 어깨와 등으로 흐드러지고, 가느다란 줄기들은 옆구리를 따라 흘러내렸다”는 대목을 지나 화가인 ‘그’는 마침내 자신의 몸에도 꽃을 그려 달라고 옛 연인에게 부탁했고 꽃으로 뒤덮인 몸이 된다. 식물이 수동적이고 고정적이며 나약한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주변 생태계를 포괄하는 존재다. ‘채식주의자’가 평범하지 않은 사람으로 치부되지만 억지스런 제도가 옭아맨 인간의 원래 본성은 무엇인지 그 존재의 의미에 대해 소설은 되물었다.

화가 이강소는 몸에 칠한 덜 마른 물감을 천으로 닦아 내면서 “존재감에 관한 퍼포먼스”를 시도했다. 생각하니 고로 존재하는 ‘나’만 있는 게 아니라 느끼는 존재도 있음을 항변했다. 벌거벗은 몸에 붓질을 하며, 화가도 소설가도 인간 본연과 실존에 대해 처절하게 고민했다. 이강소가 나체로 ‘페인팅’ 이벤트를 전시했을 때나 한강이 처음 ‘채식주의자’를 발표했을 때는 공교롭게도 같은 나이, 서른 넷이었다. 이강소의 행위예술은 백남준과 더불어 1세대 미디어아트의 양대 거장이 된 박현기(1942~2000)가 촬영해 줬고 당시의 사진들과 물감 묻은 천이 ‘제3회 에꼴 드 서울’ 전시에 출품됐다. 이 시대에 내가 할 수 있는 예술이 무엇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한 젊은 작가의 몸부림이 읽힌다.

이강소 ‘섬으로부터’ /사진제공=대전시립미술관


그런 작가의 행적을 알아야 추상회화인 ‘무제 91182’가 제대로 보인다. 제작 이듬해인 1992년 영국 국립미술기관인 테이트갤러리 리버풀에서 전시된 그림이다. 구름 낀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삭막한 수초 사이로 외롭게 뜬 빈 배가 보인다. 흰 구름 한 덩이가 외로운 배와 짝을 이룬다. 아이가 맘대로 그린 그림 같은가. 하지만 체계적인 미술교육을 받아 데생부터 야수파, 표현주의, 기하학적 추상화, 앵포르멜 등의 다양한 양식을 섭렵한 중견 화가의 붓질이 어린아이를 닮기란 쉽지 않다. 이미 각잡고 틀잡힌 표현능력이 더 자연스러운 그가 의도와 의식을 지워버리는 일은 끝없이 읽고 쓰기를 반복하는 선비의 노력만큼이나 지난하다. 무심히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는 그린 다음 더 큰 붓질로 지워버리고 마르기 전에 또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그리면서 그리지 않으려는 노력이라니! 그래서 분명 붓자국은 많은데 눈에 보이는 ‘그려진 것’은 빈 배와 바람의 움직임뿐이다.

이강소 ‘청명 16102’ 2016년작, 360x310cm 캔버스에 아크릴. /소장=파라다이스문화재단




이강소는 일명 ‘오리그림’으로 유명하다. 어느 날 친구들과 삼천포 바닷가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문득 푸른 바다 위 하얀 돛단배가 눈에 들어오더란다. 그래서 1985년을 즈음해 오리·배·집·사슴 등이 등장하는 그림들을 그려오고 있다. 생생하게 묘사하듯 그린 오리가 아니다. 운필만으로 오리의 움직임을 그렸을 뿐이니 오리로 보여도 좋고 굳이 오리가 아니어도 괜찮다. 그런 점에서는 조선의 문인화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한 화가는 비슷한 시기에 흙덩이를 반죽처럼 주물러 떡처럼 썰어놓은 듯한 입체 작품을 선보였다. 수십 수백 번 주무르고 내친 반죽 행위는 결코 결과물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 몸짓 손짓의 흔적이 반죽 안에 응축돼 남았을 뿐이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고상한 광기가 서린 그림에서 오리도 찾고 기러기도 발견하고, 몸부림치는 젊은 사내와 뒤엉킨 남녀를 찾아내는 것이 결코 ‘틀린 눈’은 아니다.

“나의 모든 작품들은 보는 사람과의 관계, 보는 사람에게 작용하는 관계를 중시합니다. 있는 것, 존재하는 것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적용하는 관계 속에서 움직이는 상태를 중시합니다. 그것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설정일 뿐입니다. 그 속에서 자신도 자유롭고 싶습니다.”

이강소는 어린 나이에 면장을 지낸 할아버지의 고미술 수집품 속에서 문화적 풍요를, 한의사였던 아버지와 염직공장을 경영한 집안 환경 덕에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자랐다. 경북중학교 때 미술반 활동을 했고 경북고 2학년 때는 뜻맞는 친구 넷이서 ‘청운회’라는 그룹을 만들어 대구 미국공보원 옆 육군극장 건물에서 전시를 열었다. 군부대 사단장을 찾아가 전시장을 빌린 것도 당돌하거니와 전기도 끊긴 곳을 전시장으로 재정비할 만큼 당찼다. 이후 이 공간은 경북도청의 공보관 화랑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후 ‘신체제’라는 미술 연구 모임을 결성했고 현대미술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강소의 1974년작 ‘생김과 멸함’. 짚 멍석 위에 올려둔 사과를 관객들이 돈 내고 사 가 결국엔 모두 없어지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 작품을 이룬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1973년 명동화랑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은 한국현대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게 됐다. 하얗고 반듯한 공간에 그림을 걸어야 하는 게 전시이거늘, 그는 주점의 탁자와 의자를 전시장에 가져다 놓고 ‘선술집’을 차렸다. 전시 기간이 곧 술집 장사기간이었다. 전시장의 아우라를 지우고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였다. 45년 전에도 파격적이었던 이 ‘선술집’이 한 달 넘게 재연됐음에도 불구하고 탁자에 앉아 막걸리 따라 마시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고 한다. 작가는 끊임없이 ‘틀’을 지우려고 애써보지만 갤러리 간판이 붙은 곳의 문턱은 여전히 완고한 모양이다. 1970년대 답답한 현실을 살아가던 예술가는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사람들을 향해 건네는 위안이 그림 한두 점으로는 모자랄 것만 같았다. 한 잔 술에 털어보고 얼굴 마주하고 얘기 좀 하자며 자리를 벌렸던 것이건만, 시대도 사람들도 그 시절과 별반 달라진 게 없나 보다. 짚 멍석 위에 잘 익은 사과와 동전통을 가져다 두고 관객이 직접 사가게 한 1974년작 ‘생김과 멸함(사과 1개 50원)’이 ‘사과 1개 2,000원’으로 물가 상승폭 40배를 반영한 것 정도만 변했을 뿐.

이강소의 작품들은 미술이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있고(有) 없고(無)의 상태가 아니라 있었던 것이 지금 잠시 사라진 빈(虛) 상황에 가깝다. 드러나는 결과물 이전에 분명 존재했던 그 격렬했던 흔적을, 수면 위에서 마냥 평화로워 보이는 백조나 오리의 쉼없는 발길질을 잊지 말자.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이강소 ‘섬으로부터 98139’ 1998년, 227.3x181.8cm 캔버스에 아크릴.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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