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황소 이정섭 대표는 2012년도부터 신인배우를 선발하고 교육하여, 주역 배우로서뿐 아니라 제작, 연출, 시나리오 분야로도 협업, 참여하는 장편영화제작 시스템을 생각했다. 대기업으로 편중된 독창성 없는 작품으로는 좋은 신인배우가 나오기 힘들다고 판단, 기존 상업영화계에서 선보이기 힘든 예술성과 상업성의 균형을 갖춘 작품, 신인배우를 주역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신인배우만을 위한 전문 제작사 브랜드를 만드는 것부터 출발했다고 한다. 이정섭 감독은 2000년 제1회 서울넷페스티발 지원작 ‘연인’의 각본, 연출로 데뷔, '역도산' 공동제작사 대표로 제작자로서 상업영화계에 입문해 설경구 주연의 '사랑을 놓치다', 이동욱 주연의 '최강 로맨스', 김강우 주연의 ‘가면’, 이선균 주연의 '로맨틱아일랜드' 등 상업영화의 각본가, 프로듀서, 제작자로서 경력을 쌓고, 김수현, 이성민 주연의 영화 '리얼' 기획, 각본과 감독으로 진행하던 중, 완전히 다른 편집방향에 대한 이견을 좁힐 수 없어 제작진과 협의하여 연출에선 하차했었다. 수많은 기자들의 인터뷰 시도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고사하던 이정섭 감독이, 이제 ㈜성난황소의 신인배우들을 소개하기 위해 인터뷰에 응했다.
Q. 먼저, 그 동안 인터뷰를 잘 안했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상업영화 제작자, 프로듀서 일을 먼저 하다보니까, 우선순위에 있는 배우나 감독을 먼저 돋보이게 하는 것에 익숙해서, 나서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영화에 대한 철학이나 관점들이 매년 인터뷰마다 말이 바뀔 것 같아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누군가 이런 얘기를 해주었는데, 기차를 타고 뒤를 돌아보면 굽이져 있는데, 기차에 탔을 때는 계속 직진으로 달렸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요. 항상 열심히 일직선으로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굽어져있었어요. 제가 아무리 직선을 외치고 최선을 다해도, 뭐 늘 굽어진 길을 달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니, 이제 인터뷰도 두렵진 않습니다.
그리고 5년을 준비해서 만든 일종의 영화 극단이랄까요. ‘젊은영화인 성난황소’라는 신인배우들을 위한 독립영화 제작사, 매니지먼트 브랜드를 만들어, 멤버들과 함께 새로운 시스템의 영화를 만들고 있는데, 이에 대한 소개를 하려고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Q. 배우나 가수 매니지먼트에서 영화나 드라마 제작을 하는 경우는 많이 보았지만, 역으로 영화제작사에서 배우를 양성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신인배우를 위한 프로덕션 브랜드를 만든 이유에 대해 궁금합니다.
“2000년대 초반, 젊은 나이로 상업영화 제작자로서 뛰어들었을 때, 저의 고민은 캐스팅이었습니다. 선배 제작자들이 기성 스타배우들과 단단한 연대가 있었기 때문에, 진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의 돌파구는 젊고 새로운 배우들을 기용하는 방법밖에 없었어요. 영화에는 영향력이 크진 않았지만, 드라마 시장에서 떠오르는 배우를 쓰는 것이요. 당시는 영화배우와 탤런트가 엄격하게 구분되어서 투자가 이뤄졌던 시기라서, 투자자들에게 많은 설득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동욱, 김강우, 이민기, 이선균 등이 영화계에 자리를 잡기 전이었는데, 이런 배우들을 먼저 기용함으로써 영화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스타가 되자, 신인배우들에 대한 선구안이 좋다는 소문이 났고, 선배 제작자들이 제게 캐스팅을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정말 오디션을 많이 보러 다녔습니다. 이후로도 선배들의 작품에 좋은 배우들을 많이 추천했고, 그들도 다 잘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대기업의 기획 영화나, 대형매니지먼트의 드라마로 인해 신인배우가 나올 수 있는 통로가 대부분 닫히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적은 대사가 있는 배역도 인지도 있거나 유명 배우의 몫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고, 대형 영화에 간신히 오디션으로 뽑힌 신인배우는, 멀티 스타캐스팅으로 점철된 영화에 돋보일 리가 없습니다. 다양한 채널에서 스타와 배우가 배출되었던 과거와 다르게, 현재는 독립영화의 의존도가 높아지는 상황이지만, 예술과 상업이 어우러지는 잘 만든 독립영화를 만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말이 길어졌는데요. 네, 저의 신인배우를 위한 브랜드 프로덕션을 만든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본이 투입되어 만들어지는 배우들이 아닌, 작품을 통해 연기력과 재능, 노력만으로도 성공할 수 있는 배우들의 투명한 무대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Q. 작가로 먼저 영화계에 입문했다고 들었습니다.
“대학 재학시절, 연극연출을 맡게 되어, 공연을 위해 첫 습작으로 쓴 희곡이 ‘죽은 그들, 내가 죽여 죽는다.’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공연을 정해놓고, 일주일 만에 썼는데 꽤 반응이 좋았습니다. 20년이 넘은 지금도 희곡과 연극을 공부하는 전국공연단체와 대학 연극동호회, 극단, 대학로 극에서도 꾸준히 공연을 올리고 있는데, 작가명이 ‘증스리 윌리스’라고 알려져서 다들 해외작품인 줄 알고, 작가의 저작권 동의 없이 마구 공연이 되고 있습니다. (작가에게 허락을 받고 공연 올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위 희곡의 저작권은 제게 있습니다. 꼭 이글도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시기에 희곡, 소설, 영화 관련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90년대와 2010년대가 얽힌, 기억상실과 타임슬립 소재인 미스터리 멜로 ‘미래 여인’이라는 첫 소설을 습작했었는데, 그때 미완성이었기 때문에, 십여 년이 지난 2011년에 윤색하여 장편소설로 출간했고, 독자들로부터 꽤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 북투필름 선정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그 시기에 쓴 단편소설 ‘리얼’이라는 작품은, 작년 개봉했던 김수현 주연의 영화 ‘리얼’의 원작이기도 하고요. 이 작품은 ‘지킬 앤 하이드’의 이야기에 원형을 두고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약물 실험에 대한 소재로 쓴 작품이었습니다. 이후, 2000년에 쓴 ‘연인’이라는 첫 단편 시나리오를 연출한 뒤, 십여 편의 상업 장편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상업영화를 제작하고 연출하고 있습니다.”
Q. 그럼 작년에 논란이 됐던 영화 ‘리얼’에 대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그 영화를 기획, 각본, 연출하던 중에 편집 이견으로 하차한 내용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당대 가장 주목받던 스타의 작품이다 보니, 많은 모함과 이간질, 영문 모를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처음과 다르게 제작진들과 작품의 편집 방향성에 이견이 생겼고, 화려한 배우들과 거대한 투자자들에 비해 영향력이 미비했던 제 자신에게, 점점 확신을 갖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우울증이 심하게 오기도 했습니다. 생각보다 이게 너무 힘들더군요.”
Q. 영화 ‘리얼’ 전에 하일권 작가의 웹툰 원작 ‘목욕의 신’과 사나이픽쳐스와 함께 하기로 했던 느와르 액션 영화 ‘폭력의 도시’의 진행상황이 궁금합니다.
“스키점프 소재인 하정우 주연으로 개봉을 했던 영화 ‘국가대표’의, 각본과 감독 제안을 받아 한참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청춘 코미디 작품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당시 제작과 시나리오 작업을 병행하던 작품이 많아, 결국 ‘국가대표’는 고사하게 되었지만, 그런 작품의 소재와 원작을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하일권 작가의 ‘목욕의 신’ 웹툰 1, 2화를 보자마자 곧바로 하일권 작가에게 연락해 찾아가서, 영화를 연출을 하고 싶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작가님이 제 연출 방향을 듣고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이후 시나리오를 쓰고, 문와쳐 윤창업 대표와 함께 진행을 하다가, 배우 캐스팅 기간이 길어져 결국 저는 ‘리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습니다.
2010년에 개봉했던 이선균, 이민기 주연의 여행 로맨스 영화 ‘로맨틱 아일랜드’라는 작품의 제작을 끝내고, 연출에만 전념하기 위해 쓴 시나리오가 바로 ‘폭력의 도시’라는 작품입니다.
정말 많은 남자 스타배우들이 좋아해주었고, 당시 남자 느와르 영화가 막 시작되던 시기라서 여기저기 함께 하자는 제안이 많았던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러다가, 2015년 봄 미국 LA에 로케이션 헌팅 작업을 하러가게 되었는데, 그때 만났던 헐리우드 프로듀서의 얘기를 듣고, 제가 준비하던 프로젝트들을 다시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국영화의 여성혐오와 성적대상화가 굉장히 심각해 보이는데 이것은 곧 문제가 될 것이고, 앞으로는 세계의 주류 영화산업은 여성의 서사로 확장해 나갈 것이라는 조언이었습니다. 2015년도에는 대한민국에서 젠더 이슈가 크게 없을 때였기 때문에, 사실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때 귀국하자마자 프로젝트들의 방향을 바꿨습니다. 그동안 또 수많은 남자 느와르 액션이 나오다보니 ‘폭력의 도시’도 그중에 하나처럼 보였습니다. 우선 배운다는 마음으로, 남성 위주 프로젝트의 미러링 작업을 해보았습니다. 결과적으론 남성의 서사를 여성의 서사로 바꾼 작품은 매우 멋지고 신선했습니다. 하지만, 19금의 여성 투톱 느와르 액션을 하겠다는 투자자, 제작자는 2015년도에도 없었고, 지금도 꺼릴 것이기 때문에, 그런 시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창하게 페미니즘 담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성감독이 페미니즘을 얘기할 자격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단지, 뻔한 남성서사가 아닌, 보다 멋지고 새로운 소재와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Q. ㈜성난황소에서 올해 신인배우를 발굴하기 위한 독립영화 제작사 브랜드 ‘젊은영화인 성난황소’를 만들고, 첫 작품 ‘낙인’을 만드는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후반작업 중인 ‘낙인’은 어떤 영화인가요?
“앞서 말했던 것처럼, 대기업 기획 주도로 끌고 가는 형태의 투자, 배급, 프로덕션 시스템으로는 독창성 있고 개성 있는 한국영화가 만들어지거나, 설자리가 부족합니다. 몇 년 전부터 영리한 예술 상업영화를 꾸준히 만들고 있는 미국의 독립영화 사례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댄스영화제 수상 작품의 프로덕션 제작비가 불과 4-5천만원 내외 밖에 되지 않았고, 현장의 메이킹에서는 감독과 주연배우들이 카메라와 동시녹음 마이크를 들고 뛰더군요. 너무 충격이었습니다. 영화의 퀄러티는 국내 상업영화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영화는,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로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잘 만든 영화와 못 만든 영화로 분류되어야 한다는 것과 시나리오와 배우, 카메라만 있다면 찍기 시작한다는 그들의 조언에, 독립영화 제작브랜드 ‘젊은영화인 성난황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배우들이 작품의 주역이 되는 것과 별개로, 프로듀서, 주요 스텝으로서의 역량과 필름메이커로서의 책임감 역시 함께 교육시키고 성장시키는데 오래 걸렸습니다. 그리고 해외에서 활동하는 젊고 실력 있는 제작진과 함께 자체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했고, 드디어 올해 첫 작품인 ‘낙인’을 만들고 있습니다.
영화 ‘낙인’은 납치된 베스트셀러작가가 밀폐된 공간에서 생존을 위한 위대한 상상력으로 적과 맞선다는 이야기로, 미래와 과거가 얽힌 위기로부터 탈출해야하는 여인에 대한 흥미진진한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마치 21세기의 환상특급이라는 넷플릭스 ‘블랙미러’ 시리즈처럼 매끈한 근 미래적 작품입니다. 이번 작품은 신인배우들에게 우선권을, 모든 배우를 공정하게 오디션을 통해 뽑았습니다. 이 영화의 기획 단계가 재미있는데, 우선 배우들이 프로듀서에 참여해서, 하고 싶은 소재의 기획안을 받았습니다. ‘밀폐된 공간’이라는 기획안이 채택되었고, 장르는 저예산이기 때문에 스릴러 드라마로 함께 결정했습니다. 일단 저의 미션이 너무 어려웠는데, 첫 번째 스무 명이 넘는 신인배우들의 역량과 연기력에 맞는 시나리오를 쓸 것, 두 번째 예산에 맞는 10회차 내외의 로케이션 세트와, SF 소재와 결합할 것, 세 번째는 여성이 중심이 되는 서사와 남녀 동등한 비율의 성비로 영화를 만들 것, 또한 입체적인 캐릭터는 여성으로 할 것. 스스로 많은 숙제를 만들었고, 이를 푸는 것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배우와 스텝의 의견을 수렴해 방법을 찾아갔던 행복한 영화 현장이었습니다.현재 뉴욕, LA, 캐나다에서 각 파트별로 최고의 후반작업팀과 함께 영화를 완성하고 있습니다.
Q. 다음 작품인 ‘요괴’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영화 ‘낙인’의 경우는 시스템과 도전이 중요했던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렇게 자신감을 얻었고, 오래전부터 취재를 하고 고민하던 사적 복수를 하는 집단인 자경단 소재의 ‘요괴’라는 작품을 준비했었습니다. 저희 소속배우들의 연기와 프로듀싱이 돋보이는 리얼리즘 영화로 제작될 것 같습니다. 시나리오는 현재 초반부만 완성이 되었는데, 12월말에 크랭크인해서, 내년 여름까지 촬영 일정이 잡혀있습니다. 시나리오와 촬영, 편집을 병행하며 저희만의 시스템으로 준비하고 있으니, 기대해도 좋습니다.
Q. 작품에 참여한 배우들을 필름메이커스로서 교육과 훈련시키고, 자체적으로 영화를 만들고, 매니지먼트까지 책임지는 시스템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럼 이후의 행보에 대해 얘기해주시겠어요.
“일단, 아무도 안하니까 제가 도전했고, 시작했으니까 끝을 보려고 합니다. 매주 성난황소랩을 통해서 신인배우들을 훈련시키고 있는데, 그 열정과 근성을 보면 하루라도 쉴 수가 없습니다. 좋은 배우들을 발굴하고, 멋진 작품을 함께 만들고, 그 배우들을 성공시키는 것, 목표는 이렇게 단순합니다. 제작자, 작가, 감독이라고 해도, 제가 로드매니저가 되어서 배우를 위해 현장에 뛸 각오도 되어있습니다. 배우들을 알리고 성공시킬 수 있다면, 뭐든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영화 ‘요괴’는 한참 프리프로덕션 중이고, 내년 봄에 ‘내가 너를 만나면’이라는 제목으로 뉴욕에서 로맨스 영화를 촬영할 예정입니다. 또 큰 규모의 영화 두 편이 시나리오 작업 중입니다. 영화 ‘시네마천국’의 중년의 주인공 토토가, 어린 토토를 다시 만났을 때처럼, 이렇게 함께 땀 흘리며 영화를 하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는 요즘입니다. 곧 세계무대로 뛰어들 ‘젊은영화인 성난황소’ 배우들을 기대해주세요.”
/김동호 기자 dongh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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