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개봉된 스탠리 큐브릭의 공상과학(SF)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는 목성 탐사선에 장착된 슈퍼컴퓨터 ‘할(HAL 9000)’이 돌연 반란을 일으킨다. 의사소통은 물론 인간의 감정까지 읽어 행동 예측이 가능해진 할은 비밀 임무의 정체를 파헤치려는 승무원들을 우주선 밖으로 던져버리고 선실에 가둬버린다. 인간이 일방적으로 내린 명령을 지키려다 결국 인간을 배반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슈퍼컴퓨터란 대용량 데이터를 초고속으로 분석·처리하는 시스템으로 연산처리속도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 초기에는 프로세서 한 개를 사용했지만 1990년대 들어 작은 컴퓨터를 여러 개 연결해 속도를 끌어올리는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 최초의 슈퍼컴퓨터는 1976년 미국의 시모어 크레이가 만든 ‘크레이(Cray)-1’으로 속도는 80㎒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후 기준 자체가 모호해지자 매년 두 차례 미국과 유럽에서 회의를 열어 세계 컴퓨터 가운데 연산처리속도 500위 이내에 드는 컴퓨터에 ‘슈퍼’라는 명예를 부여하고 있다. 기상 예측 등의 시뮬레이션, 유전 정보나 우주의 생성비밀 같은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려면 초고속·거대 용량을 갖춘 슈퍼컴퓨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슈퍼컴퓨터는 국력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각국마다 자존심을 건 경쟁을 벌이고 있다. 6월에는 미국의 ‘서밋’이 중국의 ‘타이후 라이트’를 제치고 5년 만에 세계 최강 슈퍼컴퓨터에 올랐다. 서밋은 1초에 12경2,000조회의 연산을 처리할 수 있는 122.3페타플롭스(Pflops)의 실측성능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슈퍼컴퓨터 1호는 1988년 도입된 ‘크레이-2S’ 시스템으로 메모리 1GB에 디스크 용량도 60GB에 머물렀다. 요즘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PC 성능에도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한국의 슈퍼컴퓨터 5호인 ‘누리온(Nurion)’이 10년 만에 향상된 성능을 갖추고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는 소식이다. 587억원이 투입된 누리온은 25.7Pflops의 성능을 갖춰 세계 11위에 랭크됐다. 인간 70억명이 420년간 계산할 양을 단 한 시간 만에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셈이다. 올해는 슈퍼컴퓨터가 한국에 도입된 지 30년을 맞는다. 누리온이 한국의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선도하는 첨병 역할을 맡아주기를 기대한다. 정상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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