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유령이나 마찬가지죠. 신분증 확인, 지인 연락처도 없으니 거주자가 돌연히 사라져도 못 찾아요.”
지난 10일 오후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의 L고시원. 총무로 일한 지 석 달째라는 최모(37)씨가 고시원 거주자를 두고 한 말이다. 이날 서울경제신문이 동작구 일대 고시원 7곳을 돌아본 결과 거주자에 대한 비상연락망을 갖춘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평균 월 입실료가 40만원에 달하는 이들 고시원은 2030세대 수험생이 주 투숙객으로 상대적으로 시설이 좋은 편에 속한다. 이달 9일 7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친 ‘종로 고시원 참사’ 당시 사상자 신원 파악 및 가족 연락이 하루 이상 지체된 원인으로 고령의 일용직 노동자와 낙후된 고시원이 지적됐지만 실상 모든 고시원의 문제였던 셈이다.
고시원 입실계약서 작성 과정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고시원 계약자가 최소 한 달 이상 거주함에도 신분증을 요구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사실상 계약된 기간에 ‘방값’만 내면 성명·전화번호 등 개인정보를 허위로 작성해도 고시원 측에서는 알아낼 방법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 방문한 모든 고시원 계약서에는 비상연락망 작성을 위한 지인 및 가족 연락처 작성 공간도 없었다. 60실 규모의 노량진 T고시원 총무 황모(39)씨는 “다들 임시 거주자라 수시로 바뀌는데 신분증 확인 등 신원 파악이 무슨 소용이냐”며 “비상연락망도 수시로 업데이트해야 하는데 여력이 없고 구청에서도 단속하지 않는다”고 했다. 각 지방자치단체는 겨울철 고시원 등 다중이용시설 화재예방 안전점검 시 비상연락망을 확인하고 있어 황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자체의 부실 점검 논란도 지적될 수밖에 없다. 서울시는 최근 화재를 계기로 고시원 5,840곳을 포함해 모두 7,515곳의 소방시설과 피난 경로 등을 긴급 점검하기로 했지만 ‘눈 가리고 아웅’ 식의 행정이 되풀이되지 않을지 우려되는 대목이다.
고시원 입실계약서 작성 시 비상구 위치 등 소방안전 관련 고지도 이뤄지지 않았다. 노량진 B고시원에 2개월째 거주 중인 서모(27)씨는 “이번 화재 소식을 듣고서야 완강기 및 비상구 위치를 스스로 찾아봤다”며 “계약서에는 고시원 측이 소방안전 사항을 고지했다고 적혔지만 단 한 번도 관련 안내를 받은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개인 전열기 관리도 부실했다. 노량진 T고시원 측은 “원칙적으로 사용을 금하지만 몰래 전열기를 사용하는데 손쓸 도리가 없다”며 “개인 공간인 만큼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어 난감하다”고 하소연했다. 해당 고시원은 출입구 게시판에 올해 1월 ‘밀양 세종병원 화재’ 사망자 수 37명을 적는 등 화재 유의사항을 강력하게 공지했지만 실제 화재예방 조처는 미흡한 상황이다.
한편 고시원 건물을 소유한 건물주 하창화(78) 한국백신 회장은 법적·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백신은 최근 비소가 검출된 일본산 도장형(경피용) BCG 백신의 한국 수입사로 하 회장은 동생과 함께 각각 40%, 60%의 비율로 건물 지분을 갖고 있다. 하 회장은 2015년 서울시가 추진한 간이 스프링쿨러 설치 지원사업에 선정됐는데도 이를 거절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서종갑기자 gap@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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