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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_창업을_응원해]발달장애아 엄마로 22년, 아들과 함께하는 인생 2막

조명민 밀리그램디자인 대표

첼로전공한 음대생이 디자인의 길로

선물처럼 찾아온 아들이 바꿔놓은 인생

발달장애인 위한 디자인 연구

복지관·의료기관 등에 적용해 치료효과↑

올해 여성창업경진대회 우수상

정형화된 디자인 매뉴얼 만들겠다는 포부

조명민 밀리그램디자인 대표.




첼로를 전공하고 음대를 졸업해 음악가가 됐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첫 아이도 태어났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인생은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선물처럼 찾아온 첫 아들은 처음에 여느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두돌반쯤 됐을까. 평범한 일상 중 하루였던 그날, 아이의 상태가 평소와 달리 조금 이상했다. ‘혹시 어디가 아픈가’ 생각하면서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들른 병원에서 아이는 자폐증 진단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우리 아이를 잘 감당할 수 있을까’ 두려움부터 앞섰지만, 그순간 누가 심어놨는지 모를 모성애가 심장 깊은 곳에서 꿈틀거렸다. ‘그래, 난 엄마니까!’

그날 이후 22년째 조명민(50·사진) 밀리그램디자인 대표는 발달장애아의 엄마로 살아가고 있다. 아들은 엄마의 삶을 확 바꿔놓았다. 음악가였던 조 대표가 지금은 발달장애인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사회 곳곳의 모습을 디자인하는 인테리어 업체의 대표가 됐다.

조명민 밀리그램디자인 대표가 어느새 훌쩍 자라 스물두살의 청년이 된 아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아들을 키우면서 탈출구로 선택한 ‘건축학’, 인생을 바꾸다

“저희 아들을 만나고 삶이 달라졌죠. 조금 특별한 아이를 돌봐야 하는 것에서 오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사실 가장 힘들었던 건 가족들의 외면이었어요.”

그도 그럴 것이 친정아버지는 손자보다 아무래도 딸이 먼저였다. 딸이 걱정됐던 아버지는 딸이 아이를 포기하길 바랐다. 남편을 비롯한 다른 가족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뜻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혼자서 아이를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에 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하루 종일 집에서 아이와 씨름을 하다 보니 늘 밝았던 조 대표도 점점 어두워졌다. 우울감에 시달리는 날들이 늘어갔다.

“제가 안정돼야 아이도 안정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아이와 조금 떨어져 있는 시간을 가지면서 우울에서 탈출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조 대표가 선택한 공부는 ‘건축학’. 건축학을 처음부터 배우기 위해 39살의 나이에 학부로 입학했다. 아들을 데리고 복지관에 다니면서 받은 상처들이 그를 건축학으로 이끌었다. 아이를 데리고 복지관에 갈 때면 늘 마음이 아팠다. 환경이 낯설고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는 20분간 울다가 고작 15분 정도 치료를 받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일반인 입장에서 디자인 돼 있는 복지관 공간이 발달장애를 앓는 예민한 아이들에겐 곤욕이었다. “이용자가 어떤 부분을 불편해하는지를 파악하고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복지관에서 열리는 프로그램 개수나 형식에 따라 교육실이 만들어진거죠. 공간만 만들어 놓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방음은 어떻게 할 지, 창문 모양은 어떻게 할지, 조명은 어떻게 할 지를 고려해야 하는데 그런 세심한 배려가 부족하더라고요.”

특히 발달장애를 겪는 아이들의 감각은 일반인들과 달라서 환경의 중요성이 크다고 조 대표는 강조한다. “저희 집이 공항 근처에 있어서 비행기가 지나가는 일이 자주 있었어요. 보통 우리는 비행기가 지나갈 때 귀를 막게 되는데, 제 아들은 비행기가 지나가기 한참 전에 귀를 막아요. 소리가 들리는 데시벨 범위 자체가 다른거죠. 막상 비행기가 지나갈 땐 아이의 반응이 없었어요. 결국 이러한 행동 하나만 봐도 비장애인 입장에서 디자인한 것이 발달장애아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환경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죠.”

조명민 밀리그램디자인 대표가 아들에게 직접 그림카드를 보여주며 발달장애인의 인식 방식을 알아보고 있다.


건축학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해 발달장애아를 위한 디자인을 주제로 논문을 쓰던 어느 날이었다. 아이들을 관찰하는 복지관 선생님들에게 설문조사를 거쳐 만든 데이터를 기초 자료로 활용했다. 문득 아이들에게 직접 묻지 않았다는 찝찝함이 들었다. “발달장애아를 키우는 엄마이면서도 아이들에게 편견이 있었던거죠. ‘얘네가 무슨 표현을 하겠어, 표현을 해도 정확하지 않겠지’ 하는 편견이요.”

곧바로 발달장애인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사회복지대학원에 진학했다. 장애인의 자기결정권 등 기초적인 복지학을 배우면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부모인 나 조차 발달장애인들의 능력을 한계짓고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음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이후 조 대표는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을 직접 복지관에서 만나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디자인에 반영하고 있다.



◇발달장애아를 위해 뛰어든 ‘밀리그램디자인’ 창업

아이를 관찰하고 연구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지난해 3월, 조 대표는 밀리그램디자인을 설립해 사업에 뛰어들었다. 현재 양천·원광·성동·강북복지관을 포함해 서울에만 20곳 이상의 복지관에 밀리그램디자인이 적용돼 있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 양천장애인종합복지관 1층에 들어서면 여자 화장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빨간 바탕 문에 하얀 동그라미로 꾸며진 여성용 표식 덕분이다. 손잡이 옆 다소 낮은 높이의 벽면에도 여자 화장실 문구가 적혀 있다.

조 대표가 직접 디자인하고 적용한 작품이다.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나 키가 작은 사람들, 지적장애인들은 이를 보고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우아하고 세련된 화장실 표식 디자인은 오히려 장애인들이 인식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아요. 복지관의 주된 이용객인 장애인의 눈높이에 맞춰 완성한 화장실 픽토그램(그림문자)이에요”

양천 복지관 로비 입구에 매달려 있는 원숭이와 코끼리에서도 그의 손길이 묻어난다. 장애 아이들이 한 쪽 벽에 그린 작품과 비슷한 느낌으로 정글 테마를 살려 꾸몄다.

조명민 밀리그램디자인 대표가 서울 양천장애인종합복지관 내 화장실에 적용한 픽토그램. 빨간 바탕에 하얀 동그라미가 눈에 띈다./백주연기자


서울 신내동 원광장애인복지관 인테리어도 조 대표가 맡았다. 한 곳은 민무늬 벽으로 다른 한 곳은 줄무늬가 그려진 기둥으로 상반되는 두 공간을 만들자 발달 장애아이들은 본인의 특성에 따라 원하는 공간에 모여들었다. 예민한 아이들은 줄무늬 기둥 쪽으로, 둔감한 아이들은 민무늬 벽쪽에서 시간을 보내며 안정을 찾았다.

“치매 환자들한테도 그들을 이해해주려고 하면 병세가 나아진다고 해요. ‘넌 그게 왜 불편해? 너 참 이상해’라는 말 말고 ‘그래, 너 불편하겠구나. 내가 어떻게 도와줄까?’ 이렇게 다가가면 발달장애아들도 만족감이 올라가고 건강이 좋아져요. 복지관에서도 치료를 받을 때, 옆방에서 들리는 소리나 바깥에 지나가는 차 소리, 치료선생님이 입은 옷의 복잡한 패턴 등 무심코 지나치는 사소한 것들을 발달장애인 입장에서 바꾸면 치료효과도 커지죠.”

조명민(오른쪽) 밀리그램디자인 대표와 조 대표의 아들이 함께 첼로 연주를 하고 있다.


엄마의 사랑과 관심 속에서 어느새 스물두살의 청년이 된 조 대표의 아들은 엄마를 따라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가로 성장했다. 함께 연주회에 나가 연주하는 시간이 조 대표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사업도 점점 커지고 있다. 올해 밀리그램디자인은 여성창업경진대회에서 우수상에 선정됐다. 올해 안에 사회적 기업 인증도 받을 예정이다. 아직 초기단계 기업이라 매출은 많지 않지만 조 대표에겐 확실한 비전이 있다. 놀이치료실이나 복지관, 체육관 등 어느 곳을 가더라도 발달 장애인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디자인 매뉴얼을 만들겠다는 꿈이다. 그는 “몸이 불편한 신체 장애인들의 요구사항은 그동안 사회 곳곳에 반영돼왔지만 발달 장애인은 사각지대에 놓여있었다”며 “더 많은 복지관과 의료기관과의 협업을 통해 발달 장애인들을 위한 대표 디자인으로 자리잡고 싶다”고 밝혔다.
/백주연기자 nice8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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