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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두 얼굴의 을지로…요즘 뜬다는 '힙지로' 가보니

낮에는 노동과 삶의 터전, 밤에는 2030세대 아지트

  • 최정윤 기자
  • 2019-05-17 06:55:25
  • 기획·연재

을지로, 을지로3가, 신도시, 감각의 제국, 을지로 맛집,

골목 골목마다 인쇄소, 공구상, 조명가게가 들어서있는 을지로는 만물상 같은 거리다. 1970년대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인 세운상가가 서울의 랜드마크로 들어서며 인파가 몰렸지만, 전성기가 끝난 낡은 도심에는 찾는 발길이 크게 줄었다. 이런 을지로의 건물 옥상과 건물 틈 사이로 슬며시, ‘신인류’가 등장했다. 을지로를 ‘힙지로’로 만들고 있다는 이들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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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부터 운영하는 한 슈퍼의 모습이다. 이곳 골목의 ‘터줏대감’으로 불리는 사장님은 이 작은 골목이 ‘자신의 을지로’라 했다.

초여름 더위가 시작된 5월, 오후 2시쯤 찾은 을지로는 규칙적인 일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낮고 오밀조밀한 가게들이 얽혀 만드는 골목 풍경이 꽤 이색적인 것과는 별개로 낮 시간대의 을지로는 그저 생활의 터전이었다. 을지로의 한 카페에서 3년간 일해 온 김(25) 씨는 “간혹 언론이 을지로에 대해 부여하는 낡음과 친숙함, 최근 뉴트로 열풍 등 구도심에 대한 환상은 대상화에 불과하다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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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는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기계를 만지다 고장이 나면 옆 집에 필요한 도구와 부품이 있고 생각해 낸 무언가를 뚝딱뚝딱 만들기 위한 재료를 구하기도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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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감각에 맞춰 골목과 골목 사이에 작은 가게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이런 공간들이 생겨나면서 을지로는 최근 ‘힙지로(힙하다+을지로)’라는 명칭을 얻기도 했다.

을지로는 하나의 생태계다. 조명을 만든다면 조명가게에서 전구를 고르고 목재 거리에서 원하는 받침대를 살 수 있다. 전구를 두를 천은 패브릭 가게에서 고르면 된다. 스튜디오에서 디자인하고 인쇄소에 들려 프린팅을 하고 커팅까지 한 번에 가능한 골목 을지로. 길거리에서 만난 네덜란드 여행객 루스 반 애쉬는 “이곳은 외국인의 눈에 아주 흥미로운 곳”이라며 “DIY(Do It Yourself·가구 제작이나 여러 가지 물품을 기술자에게 맡기지 않고 자기 자신이 재료와 도구를 구매해 제작하거나 보수하는 것) 정신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는 큰 건물과 사무실 뒤로 노동의 현장이 숨겨져 있지만, 을지로는 일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을 볼 수 있는 게 신기하다”고 덧붙였다.

해가 지면 을지로의 풍경은 바뀌기 시작한다. 을지로 3가 일대 노가리 골목에서 호프집을 운영하는 김형도(55) 씨는 “요즘 들어 젊은 사람들이 골목을 채우고 있다”고 전했다. 과거 노가리 골목을 채우던 금융권 사람들이나 을지로 일대의 블루칼라 노동자들과 다른 20~30대가 몰려들고 있다는 설명이다. 최근 을지로에는 젊은 감각에 맞춘 카페와 펍, 복합문화공간 등이 생겨나고 있다. 이들은 인쇄소 골목들 사이로 스며들어 오래된 건물들의 고층에 자리 잡았다. 무심코 지나쳐버리기 쉬운 작을 불빛과 소리로만 이들을 찾을 수 있다. 빛을 따라 허름한 건물을 올라가다 보면 셔터가 내려진 사무실과 상점에 이곳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내 빨간색, 초록색 불빛이 보이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엔 낮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막춤 환영, 헌팅 금지’를 내세우며 금·토에는 디제잉을 하는 복합문화공간, ‘감각의 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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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조명 아래 다양한 포스터와 소품들이 장식돼 있다. 사진은 밤 10시 전 DJ 파티가 시작되지 않아 손님들이 앉아서 술을 먹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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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프와 오락기기를 가지고 놀고 있는 손님의 모습이다. ‘추억의 게임’을 하며 즐기고 있다.

2000년대 노래가 흘러나오는 쪽으로 들어가자 이내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 펼쳐졌다. 스모그가 가득한 방에 중구난방 조합의 가구들. 대리석 세면대 위에 DJ 기계를 놓고 디제잉을 하고 있는 하와이안 셔츠의 사장님. 소고와 탬버린을 들고 음악에 몸을 맡기며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흔히 강남과 홍대에서 보는 클럽과는 또 달랐다. 옥상으로 올라가니 대형 옥돌 침대를 평상 삼아 외국인들이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고 안쪽에서는 추억의 게임 펌프를 하며 젊은 여성 둘이 뛰어놀고 있었다. 줌바 클래스, 낙서 모임, 마피아 게임 등도 진행된다.

원래 광고회사를 다니던 흥건 감각의 제국 대표는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즐길만한 ‘열린문화회관’을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하필 을지로를 고른 이유에 대해선 “쓸모없는 것에서 가치를 찾는 작업을 좋아한다”며 “을지로가 구도심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재미있는 것을 시도해 본다면 이 동네의 새로운 가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미 파인 아트를 비롯해 다양한 크리에이터들이 을지로로 모여든 지는 오래됐다. 감각의 제국이 들어서기 전 이미 ‘신도시’나 ‘십분의 일’, ‘호텔수선화’ 등 비슷한 공간들이 존재한다. 흥건 대표는 “디자이너나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공간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여기서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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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3가 골목의 낮 모습이다. 낮에는 ‘신도시’ 간판을 찾기 힘들만큼 다른 용접 가게나 공구상과 한데 어우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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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파티가 열리고 있는 ‘신도시’의 입구다. 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큰 음악소리가 들린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가게가 대로변에 있거나 눈길을 끄는 큰 간판을 달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직 작은 표시만으로 공간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을지로 공간들 사이엔 암묵적인 룰이다. 나름의 취향과 방향성을 가지고 꾸준히 해 나가면 아무리 구석지고 후미진 곳에 있더라도 사람들은 찾아올 것이고 그런 이들과 공간의 색을 공유하고 싶어하는 생각이 깔렸다. 흥건 대표는 “길을 가다 들려보는 곳보단 아는 사람만 찾아오는 ‘아지트’ 같은 공간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맛집’과 ‘힙한 카페’를 찾아오는 젊은 층이 늘어나는 것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근처 익선동의 경우 임대료가 치솟으며 기존 주민들이 떠밀려 나갔다. 외국 디자이너 시모나 트럼은 “프린터, 커터, 바인더 모든 게 다 있는 을지로만의 ‘생태계’는 다시 만들 수 없으며 오랜 시간 축적된 사람 간의 이야기와 삶이 송두리째 사라질까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한 곳에서 다양한 공구가 판매되고 있을 때 옆집 조그마한 카페에서는 브런치를 먹고, 또 다른 옆집에서는 클럽처럼 춤을 출 수 있다면 정말 멋있을 것 같다”며 “단 거대 자본이 아닌, 독창적으로 만들어질 때”라고 강조했다.
/글·사진 최정윤 인턴기자 kitty419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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