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7년 6월26일, 17세 대장장이 찰스 뉴볼드(Charles Newbold)가 주철제 쟁기(사진)로 특허를 따냈다. 미국에서는 최초의 철제 쟁기 특허였다. 당시까지 일부 대농만 유럽제 철 쟁기를 사용할 뿐 얇은 철판을 입힌 목제 쟁기를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어서 뉴볼드의 발명품은 관심을 끌었다. 통짜로 제작된 주철 쟁기와 나무 손잡이가 달린 뉴볼드의 발명품은 넓고 깊게 땅을 팔 수 있었으나 상품화에는 실패했다. 10대의 발명품에 대한 의구심도 있었지만 농부들이 무겁고 큰 쇠 쟁기가 토양을 오염시킬 것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뉴볼드는 쟁기를 개량하고 홍보하는 데 돈과 시간을 쏟았으나 도무지 팔리지 않았다. 주철은 강했지만 부러지면 용접이 어려웠다. 판로가 막힌 가운데 10년 세월이 흐른 1807년 발명가 데이비드 피콕이 삼중날 쟁기로 특허를 받았다. 뉴볼드는 바로 소송을 걸어 배상금 1,500달러를 받아냈다. 요즘 가치로 45만5,000달러에 해당(비숙련 노동자 임금 상승 기준)되는 돈을 챙긴 뉴볼드의 얘기는 더 이상 전해지는 게 없다. 최초라는 영예만 남았을 뿐 뉴볼드 쟁기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피콕의 쟁기도 상업화에 실패하기는 마찬가지. 파손되면 쟁기날을 교체할 수 있는 형식이었으나 개량을 거쳐도 판매가 신통치 않았다. 잦은 고장으로 신뢰성이 떨어진 탓이다. 미국에서 쇠 쟁기가 대중화한 시기는 1814년부터다. 발명가 제스로 우드(당시 40세)가 선보인 쇠 쟁기는 부품 교환은 물론 신뢰도가 높았다. 쇠 쟁기에 이어 1834년에는 25세의 청년 발명가 사이러스 매코믹이 작업속도를 5배 높여준 자동수확기를 세상에 내놓았다. 유사제품과 특허분쟁으로 12년간 판매실적이 100여대에 그쳤지만 에이브러햄 링컨 변호사를 포함한 소송 상대방과의 법정분쟁에서 모두 이긴 뒤 연간 수천 대씩 팔았다.
매코믹의 성공은 발명 의지를 고취해 탈곡기에서 파종기에 이르기까지 수백 종의 농기계를 탄생시켰다. 농업인구는 줄어도 기계화와 대형화로 미국은 최대 농업국가로 떠올랐다. 미국의 농업 기계화를 완성시킨 것은 전쟁. 1차 세계대전이 터진 유럽에 군마(軍馬)로 팔려간 말을 대신하려고 농부들은 각종 농기계를 사들였다. 전쟁 기간 중 농축산물 수출도 5배 가까이 늘어났다. 오늘날 미국 농업 종사자는 인구의 3%에 불과해도 전 세계 곡물시장을 지배한다. 갈수록 새로운 뉴볼드들이 판친다. 생산시설도 없이 특허권만으로 돈을 쓸어가는 ‘특허 괴물’들이.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