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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창만필] 우연과 필연

서구일 모델로피부과 원장

우연히 읽은 손 다한증 치료 논문서

보톡스 주사가 효과적인 것 알아

어제의 우연에 땀·열정 합쳐질때

내일의 필연을 만들어 낼 수 있어

서구일 모델로피부과 원장




고층빌딩에서 수리공이 떨어뜨린 망치에 길을 가던 행인이 맞아 사망했다. 수리공은 우연히 망치를 놓쳤지만 그 결과는 행인의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현상을 낳고 말았다. 노벨의학상 수상자인 자크 모노는 저서 ‘우연과 필연’에서 진화론을 이런 논리로 설명했다. 확률적으로 정말 일어나기 어려운 우연한 생화학적 반응에 의해 무생물 단계에서 생명의 기본인 세포가 우연히 탄생했고 복잡다단한 진화과정을 거쳐 현재의 하등 또는 고등생명체라는 필연적인 존재가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대학 시절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궤변 같기도 하지만 진화론을 주장하는 훌륭한 논리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보니 우연과 필연의 논리가 우리 인생살이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지난 1998년 필자가 서울대병원 피부과 임상강사로 근무하던 시절, 손에서 땀이 많이 나는 국소다한증 환자에게 보툴리눔 독소를 손에 주사하면 땀이 나지 않는 효과가 5~6개월 지속된다는 논문을 미국피부과학회지에서 우연히 접하고 눈이 번쩍 떠졌다. 국소다한증, 그중에서도 특히 손 다한증은 죽을 병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전염병도 아니지만 본인들은 큰 고통을 겪는다. 겨울에 젖은 손이 차가워져서 동상에 걸리기 쉽고 시험을 치거나 필기를 할 때 밑의 종이가 젖기 때문에 수건을 깔고 해야 하는 등 일상생활에 불편함은 물론이고 악수를 하거나 다른 사람의 손을 만졌을 때 차갑고 축축한 느낌을 줄 수 있어 사회생활하는 데 지장을 주기도 한다. 한 연구에 의하면 만성류머티즘성 관절염 환자나 만성신부전 환자들보다도 국소다한증 환자가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질병이다. 그러나 손 다한증의 치료로 먹는 약, 바르는 약이 있지만 그렇게 효과적이지 않고 흉부외과에서 시행하는 내시경을 이용한 교감신경절제술은 효과가 영구적이지만 보상성 다한증 등의 부작용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피부과 의사의 입장에서는 ‘재미없는’ 질환 중 하나다. 필자의 레지던트 1년 차 임무 중 하나가 손 다한증 환자의 땀분비량을 측정하는 것이었는데 땀량을 재는 정밀저울이 12층에 있어 환자랑 한번 측정하러 갔다 오는 데 30분이나 걸렸다. 그리고 환자는 특별한 치료 없이 바로 흉부외과로 의뢰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피부과 모 교수의 논문 욕심 때문에 환자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검사를 매일같이 강행해야 했었다. 그 ‘아픈’ 기억이 생생한 덕분인지 주사 시술만으로 수개월간 땀 분비가 현저하게 줄어드는 새로운 다한증 치료법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약값 역시 보톡스 한 병에 6만원으로 ‘착한’ 편이었다.

문헌조사를 해봐도 초기 단계의 논문 몇 편밖에 없는 상황이라 ‘내가 앞으로 갈 길은 이거야’라는 생각으로 3일 만에 연구계획서를 완성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서울대병원 약전에 6만원으로 적혀 있던 보톡스 약값은 오기로 실제 60만원인데 약전에 ‘0’이 하나 빠져 있었던 것이다. 양손에 두 병이면 약값만 120만원으로 5~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효과를 보고자 과연 환자들이 나설까. 비용 대비 효과 측면에서 심각한 고민을 하다가 간단히 주사로 하는 새로운 치료법이라는 점을 부각시켜 밀어붙였고 이는 필자가 오늘날 열심히 보톡스를 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만약 필지가 레지던트 때 다한증 환자의 땀량을 측정하느라 생고생하지 않았다면, 우연히 다한증 치료 논문을 읽지 않았다면, 그리고 서울대병원 약전에 보톡스 한 병이 6만원이라는 오기가 없었다면 내가 과연 지금 보톡스를 하고 있었을지 의문이다. 어제의 우연들이 모이고 모여서 오늘의 필연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다만 수십억년이 걸린 진화론과 차이가 있다면 인생은 짧기 때문에 그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연히 소개받은 많은 사람 중에서 지금의 배필을 선택하게 된 필연 속에는 반드시 우리의 열정과 노력이 들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어제의 우연에 땀과 열정이 합쳐질 때 내일의 필연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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