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1일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 3개 품목의 수출 규제를 강화한 일본의 조치가 부당하다며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습니다. 소송 과정에서 쟁점이 될 수 있는 부분을 짚어보겠습니다.
정부의 입장부터 살펴보죠. 정부는 일본이 크게 세 가지의 자유무역 원칙을 어겼다고 보고 있습니다. 먼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제1조에 명시된 최혜국 대우 원칙 위반 소지가 높다고 합니다. 해당 조항은 특정국이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대우를 받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3개 품목에 대해 포괄허가제에서 개별허가제로 전환했는데, 이에 통상 2주면 받을 수 있었던 수출허가를 최장 90일 기다려야 합니다.
무역 규정을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운영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합니다. GATT 10조에 따르면 유사한 상황의 이해관계자를 일관되게 대우하지 않는 경우, 특정 국가 수출에만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과도한 신청서류 제출을 요구하는 경우에 비일관적·비합리적으로 시행했다고 간주합니다. 앞서 일본 정부는 7월1일 수출 규제 강화 조치를 발표한 뒤 한국과 별다른 협의 없이 불과 사흘 만에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정부는 또 수출제한 조치의 설정 및 유지 금지 의무도 어겼다고 보고 있습니다. GATT 11조는 WTO 회원국이 물량을 제한하거나 수출허가 등으로 수출을 제한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일본도 한국의 반발을 의식하고 빠져나갈 구멍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의 대응 카드로는 GATT제 21조에 명시된 ‘안보상의 예외조치’가 유력하게 거론됩니다. 21조를 보면 자신의 필수적인 안보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간주하는 조치를 취하는 경우 GATT상의 의무 위반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WTO 협정상에 A라는 의무가 있는데, 안보 예외조항이 적용되는 경우 이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다소 단순한 논리가 성립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예외조항을 들먹인다고 무조건 통용되는 건 아닙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예외조항을 자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막아야 하니까요. WTO는 어떤 식으로 대처할까요.
이런 판례가 있습니다. WTO는 지난 4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무역분쟁에서 러시아의 승소를 결정한 바 있습니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둘러싼 분쟁이 이어지던 2016년 우크라이나 상품이 자국 육로를 거치지 못하도록 봉쇄하자 우크라이나가 제소를 하면서 시작됐던 분쟁입니다. 우크라이나 제소에 맞서 러시아가 꺼낸 카드가 바로 안보 예외조항입니다. 이에 재판부는 안보상 예외를 적용하기 앞서 수출 관련 조치가 안보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인지 점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재판부는 크림반도 병합 이후 무력 분쟁이 벌어지는 준전시 상황임을 고려할 때 러시아가 안보상 예외 조항을 적용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이 판례만을 기준으로 현재 한일 갈등에 적용해보면 어떨까요. 위의 판례를 근거로 ‘안보상 이유를 들먹이려면 적어도 크림반도 사태 때처럼 총탄이 오고가는 수준은 돼야 한다’는 나름의 기준을 세울 수 있을까요. 복수의 통상전문가들은 “그렇게 해석할 수만은 없다”라고 답했습니다. 지금까지 안보상 예외조항이 인용돼 승소한 사례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분쟁사례가 유일합니다. 판례가 적다는 것은 규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올 여지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통상전문가는 “판례가 너무 적다보니 예외조항이 어떻게 해석될지 가늠하기 어렵다”며 “WTO 승소를 장담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일본의 행태가 치졸하다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수출 규제를 강화하기 앞서 일본 정치인들의 발언을 보면 정치적인 문제를 경제적으로 해결하려한다는 강한 의심이 듭니다. 다만 이를 입증하는 게 손쉬운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정부가 어떤 논리로 일본의 잘못을 밝힐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세종=김우보기자 ub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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