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캐피털(VC)의 지난해 바이오 투자 규모가 역대 최초로 1조원을 돌파했다. 2012년 1,000억원을 처음으로 돌파한 이후 7년 만에 약 10배나 성장했다. 투자규모의 성장과 더불어 투자 양상도 바뀌고 있다. 바이오기업에 대한 투자가 기업공개(IPO) 직전이 돼서야 본격화됐던 기존 양상과 달리 근래에는 기업 창업 초기 단계부터 돈을 대는 장기투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8일 제약·바이오업계에 따르면 VC가 지난해 11월까지 바이오·의료 분야에 투자한 금액이 1조198억원으로 집계됐다. 역대 최초로 1조원을 넘으며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의 투자액(9,923억원)을 넘어섰다. 업계에서는 대출 형태 투자 등 집계되지 않은 금액을 포함하면 올 한해 바이오분야에 투자된 금액이 2조원을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잇따라 터졌던 인보사 사태, 신라젠·헬릭스미스 쇼크 등 대형 악재도 투자 열기를 막지 못했다. VC업계 관계자는 “정부의 바이오부문 육성 의지와 전 세계적인 바이오 업황 기대감이 투자를 늘리게 된 계기”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다만 지난해부터 바이오투자에 대한 전문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며 “생명공학을 전공하거나 바이오업계에 종사했던 사람을 심사역으로 영입하고, 설립 초기 단계의 기업들 위주로 옥석가리기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VC의 투자 초점이 초기 투자로 바뀌며 경영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코스닥 상장을 추진하는 마이크로바이옴 전문 기업 지놈앤컴퍼니가 대표적이다. 투자사 한국투자파트너스는 투자 당시 사업 목적인 건강기능식품 개발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마이크로바이옴 기술을 활용한 치료제 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회사는 이를 받아들였고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마이크로바이옴 활용 항암제 개발을 위한 임상시험 신청을 준비 중이다.
경영 개입은 사업 아이디어 제시 뿐 아니라 인력 추천도 포함된다. 올해 상장을 추진하는 SCM생명과학은 신임 대표를 구할 때 투자사인 한국투자파트너스에 후보군을 문의했고, 투자사가 추천한 이병건 전 녹십자 대표를 신임 대표로 선임했다.
초기투자가 늘어나고, 적극적인 경영개입이 늘어나며 VC업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전공으로도 경제학이나 수학이 아니라 의학이나 약학, 생명공학이 꼽히고 있다. 서울대 약대를 졸업한 데일리파트너스의 이승호 대표를 필두로 한국투자파트너스에서 대표펀드매니저로 잔뼈가 굵은 황만순 상무(서울대 약대), 김연준 상무(서울대 수의대) 등이 대표적이다. 생명공학을 전공한 젊은 심사역들도 눈에 띄게 증가했다. 약 1년 전 대형 제약사에서 벤처캐피털 업계로 이직한 30대 초반 심사역은 “생물학을 전공하고 제약사에서 일했던 만큼 VC, 투자은행(IB) 업계에 대해 잘 몰랐지만, 생각보다 금방 배울 수 있었다”며 “최근 비슷한 또래의 생명공학 전공자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한 업계 관계자는 “증권사에서 바이오 담당 애널리스트를 구하기 힘들어 할 정도로 VC업계에서 의·약학, 생명공학을 전공한 인재들을 공격적으로 영입하고 있다”며 “현재 코스닥 시가총액 상위 바이오주에 대해서도 보고서가 잘 나오지 않는 것도 VC가 인력 빼가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올해 바이오벤처 투자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의 육성의지와 맞물려 경쟁력 있는 국내 바이오벤처들이 꾸준히 탄생했기 때문이다. 창업 4년만에 글로벌 제약사에 1조원대 기술수출을 진행하는 등 실적도 뒷받침되고 있다. 한 벤처캐피털 심사역은 “지난해 예상할 수 있는 악재가 다 나온데다 그동안 투자했던 성과가 나오고 있는 만큼 바이오기업에 대한 투자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며 “10년 새 초기투자(시리즈A) 규모가 50억원대에서 500억원대로 열배 가까이 성장했는데 올해는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우영탁기자 ta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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