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전 창립한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크게 세 차례 바뀌었다. 7명의 비상근위원제(당연직 제외)로 출발했다가 1962년 비상근 체제를 유지한 채 위원 수만 9명으로 늘어났다. 가장 큰 변화는 통화정책의 중립성을 보장한 1998년. 금통위 의장이 재무부 장관에서 한은 총재로 바뀌면서 비로소 한은은 ‘재무부 남대문출장소’라는 오명을 벗었다. 금통위원을 7명으로 줄이면서 상임제로 전환한 것도 이때다. 2004년부터 증권협회의 추천 몫이 없어지고 부총재가 당연직으로 참석하는 변화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달라지지 않은 것은 금통위원 추천제다.
유명무실한 금통위원 추천제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한은 창립에는 미국 중앙은행의 조력이 있었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과장급 실무자가 반년 동안 한국에 파견돼 한은법 제정에 관여했다. 그렇다면 미국식 제도인가. 아니다. 한은 60년사 집필에 참여한 차현진 한은 인재개발원 교수는 “패망한 일본 제도를 베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을 점령한 미국 맥아더 사령부는 1942년부터 전쟁 지원 역할을 수행했던 일본은행(BOJ)을 일종의 ‘전범기업’으로 간주하고 어떤 형태로든 군국주의 색채를 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를 간파한 일본이 군정당국에 제시한 개혁카드가 통화정책 결정회의인 ‘정책위원회’ 설치와 위원의 민간추천제입니다. 정부 입김에서 자유롭고 민주적 통제가 필요했던 맥아더 사령부가 이를 수용했습니다.” 추천권은 은행권에 2명, 상공업과 농업 분야에 각각 1명씩 부여됐다.
하지만 정작 일본은 1997년 추천제를 폐지해버렸다. 주요 선진국의 사례가 없어서다. 이때 독립성 강화 차원에서 정부 측 위원 2명도 없앴다. BOJ 정책위원회(총재와 부총재 2명은 당연직)에 참여하는 심의위원 6명은 총재·부총재처럼 국회의 동의를 거쳐 내각이 임명한다. /권구찬 선임기자 chans@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